핵 동결-대북제재 완화 빅딜 가능성 고조
韓, 핵 위협 가중·연합방위태세 약화 최악
정부, 협상 의제설정 단계 적극 개입 필요성
대미투자 등 한미관계 걸림돌 먼저 풀어야
정부 “패싱 말할수록 설자리 줄어들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적극적인 ‘구애’와 북한의 직간접적인 ‘호응’으로 북미대화 분위기가 조성되는 가운데 한국의 입지가 좁아지는 모습이다. 한국으로서는 한반도 평화로 가는 여정에서 ‘페이스메이커’로서 일익을 담당할 수도 있지만 북미 간 논의 과정에서 배제되는 ‘패싱’ 우려도 지우기 어렵다.
특히 북미가 핵동결과 대북제재 완화·한미훈련 축소 등을 주고받는 식으로 협상을 가져간다면 한국 입장에선 북핵 위협은 그대로인 상황에서 연합방위태세만 약화되는 최악의 결과에 직면하게 된다.
한국으로서는 페이스메이커냐, 패싱이냐 기로에 서게 된 셈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김여정 노동당 부장의 담화와 무력시위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의제를 주도하려 하는 만큼 향후 북미대화가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이관세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장은 21일 북한의 행보를 볼 때 향후 북미대화 성사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이 소장은 “북한이 미국과 대화에서 할 얘기들을 담화를 통해 풀어놓고 있다”며 “미사일 발사도 ‘일촉즉발 상황 인식을 똑바로 하라’는 표현”이라고 분석했다.
앤드루 여 브루킹스연구소 한국석좌는 20일(현지시간)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 개인에 대해 악감정을 품고 있지 않은 듯하기에 외교의 문은 여전히 열려 있다”고 진단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한국의 운신의 폭이 넓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북한은 김 위원장의 동생 김 부장이 이틀 연속 담화를 발표하는 등 한국 패싱을 노골화하려는 모습이다.
김 부장은 전날 조선중앙통신을 발표한 담화에서 “돌연 훈련 축소를 지시한 트럼프의 말 한마디에 서울은 제일 즐겨하던 전쟁놀이 판을 거두어야 하는 가긍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고 비난했다.
한미연합훈련 축소와 관련해선 “(한국에) 사상 처음 있는 ‘변고’일 것”이라며 “미 통수권자의 일방적인 지령에 따라 항변 한마디 할수 없는것이 지휘권을 상전에게 맡긴 허수아비군대의 숙명”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이재명 대통령의 실명을 거론해가며 “이재명의 안팎이 다른 이중적 언행은 한국의 불안초조한 모순심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비교적 절제된 톤으로 북미대화 여지를 남긴 전날 담화에 이어 하루 만에 한국을 향한 조롱이 담긴 표현을 동원해가며 북미관계와 남북관계를 분리하고, 한국을 배제하겠다는 전략적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북미가 향후 대화 국면에서 ‘나쁜 거래’를 주고 받는 시나리오도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여 석좌는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 확대를 검증 가능하게 일시 중단하는 것만으로도 현 상태보다는 나을 것”이라면서도 “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과 만난 뒤에도 여전히 핵무기 증강을 계속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은 김 위원장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일부 양보를 시도할 수 있다”며 “우려되는 점은 긴장 완화 조치를 하겠다는 북한의 확약 없이 트럼프 대통령이 한반도에서 미군을 일방적으로 철수하는 등 지나치게 많은 양보를 하는 경우”라고 말했다.
이 소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북한 핵무기 57기 언급과 관련 “‘저 사람이 부자다’라는 말과 그 사람의 구체적인 계좌잔고를 언급한 것은 느낌이 다르다. 숫자를 콕 집어 말한 것은 사실상 북한의 핵보유를 적극적으로 인정한 셈”이라며 “ ‘북한이 핵을 동결하면 제재를 완화해 주겠다’는 양상으로 대화가 흐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 하노이 회담 막후에서 북미 간 ‘스몰딜’에 제동을 건 대북 강경파인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월스트리트저널(WSJ) 기고문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연합훈련 축소 지시에 대해 “그는 첫 임기 때도 똑같이 일방적 양보를 했는데 이 실수는 현재 더 심각하다”며 “백악관의 관심이 북한에서 다른 것으로 옮겨가길 바라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했다.
반길주 국립외교원 교수는 “‘코리아 패싱’을 막기 위해 피스메이커-페이스메이커 공식을 한국이 주도적으로 따지고 들어가야 한다”며 “미 국무부와 의제를 만들고, 그 의제가 북미대화의 내용적 합의나 선언으로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반 교수는 이어 “한미동맹이라는 각별한 관계와 지위를 바탕으로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하면 미국의 외교적 목표 달성에도 유리할 것이라고 설득해 어떻게든 지분을 챙겨야 한다”며 “비핵화를 견제하는 쪽으로 한미 간 협력해야 한다. 한국의 역할이 더 중요해진 것”이라고 짚었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북한의 전날 10여발의 단거리탄도미사일 발사에 대해 “축소로는 부족하고, 향후 한미 연습을 전면 중단하라는 메시지로, 한국의 안보에 대해 커다란 도전적 요인이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 교수는 한국의 향후 대응과 관련해선 “현재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빨리 한미관계를 재정상화하고 공고히 하는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대미 투자, 쿠팡 문제, 호르무즈 해협 기여 등 이번 사태와 얽힌 문제부터 풀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통일부 고위당국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북미대화 움직임과 관련 “지금은 존재론적 위협이 북핵 위협”이라며 “그런 현실 속에서 남북관계가 막혀 있고, 그러면 이것을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은 북미대화 재개 외에는 뭐가 있겠나”라고 밝혔다.
이어 “‘한국 패싱’이라고 쓰는 국민이 많아질수록 우리 힘은 줄어들게 된다”면서 “북미대화를 통해 근본적인 문제, 한반도의 불안정한 정전체제를 바꿔 보자는 거대 구상이 돌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고위당국자는 이 대통령의 트럼프 대통령을 향한 ‘경의’ 표현에 대해 ‘한미연합훈련 축소를 통해서라도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해 평화체제를 구축해 보려는 대통령의 결단’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평화체제는 우리의 가장 완벽한 안보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윤호·문혜현·김해솔·정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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