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만에 바꾼 세탁기에는 ‘AI’라는 문구가 붙었다. 기능은 달라지지 않았다. 혁신도 없었다. 여전히 단순한 물 조절에 시간 설정이 전부였다. 최근에 만난 한 업체는 AI가 식상하다는 이유로 해당 광고 문구를 ‘머신 러닝’으로 바꿨다고 했다. 흔하디흔한 표현은 신뢰도, 새로움도 각인시키지 못한다. AI 시대를 살아가지만, 진정한 AI가 사라지는 이중성을 우리는 매일 경험하고 있다.

국내외 유통업계도 일제히 ‘AX(AI 전환)’를 꺼내 들었다. 쿠팡은 생성형 AI를 검색에 도입했다. 네이버는 쇼핑 에이전트로 정보와 상품을 동시에 제안한다. 아마존은 AI 쇼핑 에이전트 ‘루퍼스’를 내세웠다.

과거의 쇼핑 플랫폼은 개발자가 짜놓은 규칙 안에서만 움직였다. A 상품을 본 고객에게 같은 카테고리의 B 상품을 보여주는 식이다. 정해진 기찻길 위의 기차다. 지금의 생성형 AI는 다르다. 인간이 규칙을 정해주지 않아도 방대한 데이터 속 숨은 맥락을 스스로 학습해 답을 찾는다. 경로 없는 자율주행이다. 문장의 앞뒤 맥락을 읽고, 대화를 이해한다. 그리고 가장 그럴싸한 답을 확률적으로 제시한다. 기술은 분명 도약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쇼핑 플랫폼에 ‘러닝화’를 입력하면 여전히 인기 상품 몇 개가 뜰 뿐이다. AI를 먼저 적용한 아마존 역시 체감은 그대로다. 루퍼스가 매출을 끌어올렸을지언정, 추천 목록이 자사 PB(자체 브랜드)에 쏠린다는 비판이 꾸준하다. 아마존 CEO 앤디 재시조차 챗GPT나 퍼플렉시티 같은 범용 AI 에이전트가 가격과 제품 정보를 자주 틀린다고 지적했다. 자사의 루퍼스를 치켜세우기 위한 발언이지만, AI 쇼핑의 현주소를 드러낸 말이기도 하다.

유통업계의 AI는 여전히 제자리다. 기존 정보를 확률적으로 조합할 뿐 진정한 통찰을 제공하지 못한다. 특정 세대가 자주 산 제품의 교집합은 보여주지만, 누군가가 지금 필요한 것은 판단하지 못한다. 플랫폼 간 데이터가 고립된 점도 한계다. 쿠팡의 구매 이력은 네이버에서 쓸 수 없다. 플랫폼은 자기 울타리 안에 갇힌 데이터로만 지도를 그린다. 판매자에게도 불투명하다. AI가 특정 상품을 왜 추천하는지 인과를 알 수 없다.

근본적인 문제는 쇼핑 플랫폼이 AI를 오직 ‘판매 도구’로만 쓴다는 점이다. 고객이 필요한 걸 찾는 것이 아니라 플랫폼이 밀고 싶은 상품의 노출 확률을 높인다. 반품률이 오르고 품질 불만이 쌓여도 거래가 발생했으니 성공이라 자평한다. 가짜 혁신의 손해는 고스란히 소비자 몫이다.

AI가 진짜 쇼핑 파트너가 되려면 본연의 강점인 맥락 이해를 발휘해야 한다. 단순한 러닝화 추천이 아니라 ‘초보 러너에게 적합한, 발볼이 넓고 무릎 부담이 적은 신발’이라는 다차원적 요구를 이해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동시에 왜 이 상품을 추천하는지 근거를 설명해야 한다. ‘인기 상품’이라는 무책임한 태그 대신 추천의 이유가 붙어야 신뢰가 생긴다.

이제 선택해야 한다. 추천 알고리즘을 더 정교하게 다듬어 플랫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광고 도구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생성형 AI의 본질인 문맥 이해를 통해 소비자의 쇼핑 경험 자체를 혁신적으로 재설계할 것인가. 추천에 갇힌 AI는 혁신이 아니다. 매출 계산기에 불과하다.

정찬수 소비자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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