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시마현 나에시로가와(현 미야마) 마을의 도자기 가마.
[출처 : 가고시마현 히오키시 관광협회]
가고시마현 나에시로가와(현 미야마) 마을의 도자기 가마. [출처 : 가고시마현 히오키시 관광협회]

조선인 도공들, 파산 위기의 사쓰마번을 살려내다

나에시로가와(현 미야마) 마을은 1598년 겨울,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 등에 참전한 사쓰마번(현 가고시마)의 장수 시마즈 요시히로가 일본으로 퇴각하면서 남원 일대에서 강제 납치한 사쓰마번 조선인 도공의 집단 거주지였다. 남원 출신 도공 박평의와 그의 아들 박정용은 일대에서 도자기 제조의 핵심 원료인 고령토를 발견하자 이곳에 가마를 짓고 도자기를 굽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사쓰마 도자기의 효시다. 사쓰마번은 무사에 상응하는 신분 부여, 가옥과 토지 무상 제공, 조선어 사용과 조선옷 착용을 허용하는 우대정책을 쓰며 사쓰마 영주와 천황, 도쿠가와 막부, 유력 다이묘들에게 진상하는 고급 도자기를 제작하도록 독려했다.

1867년, 사쓰마번의 지원으로 프랑스 파리만국박람회에 참가한 이 마을의 도공 박정백, 그의 아들 박정관, 손자 박리행 3대가 공동으로 제작하여 출품한 대형 화병은 외국 신문에서 “그 우아함과 호화로움은 다른 어디에 비견할 데가 없다”라는 호평을 얻게 되고 이를 계기로 유럽에서 사쓰마 도자기 붐이 일어난다. 그러자 이 마을 도공들이 만든 사쓰마 도자기는 해외에서의 인기에 힘입어 사쓰마번의 주요 수출품으로 떠올랐다. 도자기 수출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천문학적인 부채 때문에 파산 위기에 몰려 있던 사쓰마번의 재정은 흑자로 돌아섰고 조선인 도공들은 사쓰마번을 살리는 구원투수가 되었다.

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온 조선 도공의 후손으로서
일본 천황에게 태평양전쟁 종식을 설득해 그의 결심을 받아낸
일본 외상 도고 시게노리(한국명 박무덕).
[출처 : 미나미닛폰신문]
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온 조선 도공의 후손으로서 일본 천황에게 태평양전쟁 종식을 설득해 그의 결심을 받아낸 일본 외상 도고 시게노리(한국명 박무덕). [출처 : 미나미닛폰신문]

나에시로가와 마을에 몰려온 먹구름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1868년에 메이지 신정부가 들어서자 나에시로가와 마을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보호막이던 사쓰마번은 소멸하고 무사 계급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던 이곳 사람들의 신분은 평민으로 내려앉았다. 세상의 인심도 돌변했다. 일본인들은 그동안 도공으로 우대해 주던 조선인을 옹기장이로 멸시하기 시작했다. 나에시로가와 마을 사람들은 마을을 등지고 떠나 각자도생에 나섰다. 신분을 숨기고자 조선의 성과 이름을 버리고 일본식으로 바꾸는 사람도 나타났다. 이 가운데 도공 출신이었다가 도자기 해외 판매사업으로 전환하여 부를 쌓은 박수승은 돈을 주고 도고라는 성을 사서, 자신의 이름은 도고 주카쓰, 다섯 살짜리 장남 박무덕은 도고 시게노리로 개명하여 신분 세탁을 했다(창씨개명).

‘조센진’이란 질곡, 첫사랑을 앗아가다

고향 마을에서 수재로 인정받으며 성장한 시게노리는 도쿄제국대학 독문과에 입학했다. 그런 그가 폐결핵 때문에 잠시 학교를 휴학하고 휴양지 닛코에서 요양 생활을 하다가 그곳에서 여관을 운영하는 부잣집 딸 미쓰와 눈이 맞아 서로 결혼을 언약했다. 시게노리는 결혼 허락을 요청하는 편지를 그녀 부모 앞으로 보냈으나 석 달이 지나도록 답이 없었다. 미쓰 부모는 시게노리 집안 내력을 뒷조사해서 그가 300여 년 전,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온 옹기장이 조선인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반대하고 나섰다. ‘조센진’이란 질곡이 문학청년의 첫사랑을 앗아간 것이다.

그는 이 질곡에서 벗어나려고 눈을 해외로 돌렸다. 폐결핵에서 회복한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 문학 전공을 버리고 외교관 시험에 도전하여 세 차례의 도전 끝에 합격했다. 시게노리가 외교관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고향 마을에 전해지자 마을은 온통 축하 분위기에 흠뻑 젖었다. 시게노리의 부친은 아들의 이름이 관보에 게재된 지 이틀 후에 호적을 나에시로가와 마을에서 말소하고 가고시마시로 옮겨 호적 세탁을 한다. 미쓰 부모의 뒷조사로 혼담이 파탄 난 경험이 있던 터라, 아들의 출셋길을 열어주기 위해 흔적을 지워야 했다.

나에시로가와 마을의
조선인 도공이 제작한 사쓰마 도자기.
[출처: 가고시마현]
나에시로가와 마을의 조선인 도공이 제작한 사쓰마 도자기. [출처: 가고시마현]

천황, 반전주의자 시게노리의 손을 들어주다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된 시게노리는 독일 베를린 주재 외교관으로 파견되었을 때, 유대계 독일인 미망인 여성 에디타와 만나 일본에서 결혼하여 딸 도고 에지를 낳는다. 그는 1937년 12월 말 독일 대사로 부임하는데 일본 육군이 히틀러의 독일과 동맹을 맺으려는데 반대하다가 부임 10개월 만에 대사직에서 해임된다. 1941년 태평양전쟁 개전 직전에 외상으로 임명됐을 때 그는 미국과의 전쟁을 회피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군부의 반대와 미국 측의 냉담한 반응으로 그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외상에서 물러난다.

일본의 패색이 짙은 1945년 4월, 외상에 재기용된 그는 천황을 지키고 천황제를 유지하는 조건만 남기고 무조건 항복하자고 주장하여 1억 명 옥쇄와 본토 사수를 고집하는 군부와 첨예하게 대립한다. 이때 히로히토 천황은 어전회의에서 시게노리의 손을 들어준다. 무모한 전쟁으로 더 이상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그의 생각이 관철된 것이다. 그의 사후에 반전주의자로서 일본 국민의 희생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한 그의 업적을 기려서 세운 추모비 비문에는 “종전의 대업을 완수하고 일본국가와 국민을 구했다”라고 적혀 있다.

300여 년 전 조상의 뿌리까지 들춰내서 편견을 갖고 차별하는 것은 당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끔찍한 일이다. 이런 현상은 사회가 건강하게 작동하지 않을 때 기승을 부린다. 관용과 포용의 정신 즉 똘레랑스가 결여된 사회는 쇠락한다. 군국주의 시대의 일본 사회가 그랬다.


anju1015@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