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쿠가와 막부가 고수하던 쇄국을 개방과 개국으로 이끌고 근대화를 추진한 주역은 메이지유신 지사들이었다’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는 사실과 동떨어진 역사의 오해다. 이와는 달리 메이지유신 지사들은 개국을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반대했으며, 근대화를 부국강병으로 포장해서 일본을 군국주의로 치닫게 한 장본인이다.
오히려 개국의 물꼬를 트고 일본 근대화·공업화의 토대를 마련한 일등 공신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신의 후예들이었다. 이번 회에서는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서구열강과 수교를 추진하며 개국을 주도한 마쓰다이라 다다가타와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오구리 다다마사를 소개하여 메이지유신 지사들에 대한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아 보려고 한다.
동쪽에서 온 불청객, 미국
1840년 영국과 청나라의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했다는 소식은 도쿠가와 막부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서구 열강 가운데 유일한 교역 창구로서 나가사키의 데지마에 상주무역관을 허가한 막부는 네덜란드가 전달하는 관련 정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영국이 청나라에 이어 일본까지 침공할지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덜란드로부터 뜻밖의 정보가 흘러들어왔다. 1852년, 나가사키 무역관장 돈켈 굴티우스가 네덜란드 국왕 윌리엄 2세의 친서를 들고 왔는데, 그 친서에는 막부에 개국을 권고하며 미국이 조만간 함대를 이끌고 일본에 내항하여 개국을 요구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네덜란드가 경고한 대로 이듬해인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동인도함대는 도쿄만에 닻을 내리고 문호 개방을 요구했다. 미국이 일본을 개국시키려는 목적은 무역 통상 관계를 수립하고, 미 캘리포니아와 청나라 간의 태평양 항로를 운항하는 증기선에 식량과 석탄을 보급하는 데 있었다.
페리 제독은 이듬해인 1854년에 다시 일본을 방문해서 미일화친조약을 맺고 귀국했다. 뒤를 이어 총영사로 부임한 타운젠드 해리스는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으며, 막부 사절단은 1860년에 미국을 방문하여 비준서를 교환했다.
개국을 견인한 마쓰다이라 다다가타
페리 제독의 개국 요구를 둘러싸고 막부 내부에서는 찬반 의견이 분분했다. 이때 가장 적극적으로 개국과 통상 무역을 주장한 인물이 로주(老中·각료급), 마쓰다이라 다다가타였다.
막부의 대다수 관료는 그의 의견을 따라서 개국에 동조했다. 그는 조약 폐기를 주장하는 고메이 천황과 메이지유신 지사들이 중심이 된 존왕양이파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미일화친조약과 미일수호통상조약에 서명했다. 그가 미국과의 수교에 과감하게 나섰던 이유는 미국 헌법 체계에는 식민지 지배를 거부하는 정신이 담겨있어서 미국은 일본을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측면에서 그는 미국과의 무역 통상을 통해 일본경제의 활로를 새롭게 찾겠다는 생각에서 수교를 추진했다. 그의 영지인 우에다번(현 나가노현 우에다시)은 기후가 한랭하여 벼농사에 적절하지 못했다. 그 대신에 양잠업을 하기에는 최적지라서 그는 양잠업을 장려하고 생사(生絲)와 견직물 생산에 집중했다. 그에게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의 수교는 실크 수출 시장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그의 선견지명은 적중하여 개국 직후 일본 수출품의 86%를 실크가 차지했고 이때부터 75년간 실크는 일본 수출품 1위 자리를 지켰다. 따라서 일본은 실크 수출로 벌어들인 외화로 인해 근대화와 산업혁명이 가능했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오구리 다다마사
1860년 미일수호조약 비준서 교환을 위해 미국을 방문하는 사절단 일원 가운데 감찰 역할을 맡은 인물이 오구리 다다마사였다. 그는 방미 중에 미해군 장비공장을 견학하고 그곳의 우수한 제철과 금속 가공 기술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귀국한 그는 주일프랑스 공사 레온 로쉬를 만나 요코스카제철소 건설을 의뢰하고 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이곳에서 생산된 철로 드라이버와 렌치 등 공구와 기계 부품을 제작하여 전국 공장에 공급했는데 이것이 일본 근대화와 산업혁명의 토대가 되었다. 그는 소총, 대포, 탄약 등 무기와 장비의 국산화를 추진하고 일본 최초의 서양식 화약 공장도 건설했다. 아쉽게도 그는 도쿠가와 막부의 존속을 끝까지 주장하다가 메이지유신 세력의 자객 손에 살해당했다.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고 뒤를 이어 즉위한 다이쇼 천황 시대의 총리 오쿠마 시게노부는 “메이지 정부의 근대화 정책은 단지 오구리 다다마사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라며 그의 업적을 높이 샀다. 그는 후대에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고 그가 세운 요코스카제철소는 ‘일본 근대공학의 원천’으로 평가받고 있다.
역사에서 가정은 성립되지 않는다지만, 한일관계사를 살펴보는 필자의 눈에 비친 도쿠가와 막부 말기 일본 정국의 모습은 한국인으로서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메이지유신 지사’의 출현이다.
만약 이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지 않고 도쿠가와 막부 정권에 의한 근대화가 완성되었더라면 일본은 침략 국가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이웃 국가들과 문명을 공유하고 긴밀하게 교류하는 관계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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