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삼성호암상’ 공학상 수상자 인터뷰
과학 불모지 딛고 30년 뒤 세계적 권위자로
UN 지원받던 시절 영국 건너가 정밀공학 공부
정밀계측 기술 개발로 日로부터 ‘기술 독립’
세계 최초 펨토초 레이저 장비 우주로 올려보내
“호암상은 마지막 영예, 기초연구에 많은 예산 투입해야”

[헤럴드경제(대전)=김현일 기자] 2010년 6월 10일. 우리나라 첫 우주발사체 나로호가 발사 2분 만에 공중에서 폭발했다. 2차 발사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과학기술계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아직 러시아로부터 얻은 마지막 3차 발사 기회가 남아 있었지만 문제는 나로호에 탑재할 위성이 더 이상 없었다. 1·2차 발사 실패로 위성 두 대를 모두 날려버린 상황이었다.
정부는 부랴부랴 전국 대학교와 연구소, 기업들을 대상으로 공모에 나섰다. 촉박한 일정에 맞춰 위성 탑재체를 만들어 낼 만한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이때 김승우 KAIST 기계공학과 교수가 손을 들었다. 1000조분의 1초 간격으로 빛을 쏘는 ‘펨토초 레이저 발진기’를 나로호 위성에 실어 우주로 올려보내겠다고 나섰다. 그 어느 나라에서도 하지 못한 시도였다.
김 교수팀은 8개월 간 밤낮으로 매달린 끝에 우주용 펨토초 레이저 발진기를 만들어냈다. 위성에 싣기 위해 책상 크기의 장비를 서류 가방보다 작게 줄였다.
2013년 1월 30일. 마침내 나로호 3차 발사가 성공했다. 나로과학위성에 실린 김 교수팀의 펨토초 레이저 장비는 드디어 정상궤도에 진입해 우주와 지상을 잇는 초고속 통신을 실현했다. 전 세계 과학자들이 꿈꿨던 장면이 현실이 된 순간이다.
그렇게 우리나라는 펨토초 레이저 장비를 우주에 쏘아올려 성능 검증까지 성공한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됐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올해 4월 김 교수는 호암재단이 선정한 ‘2025 삼성호암상’ 공학상 수상자에 이름을 올렸다.
치밀하고 까다로운 심사로 유명한 호암재단은 김 교수의 우주용 펨토초 레이저 발진기 개발 업적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의 노벨상’ 영광…일생의 마지막에 받는 상”

제35회 삼성호암상 공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은 김 교수를 지난 8일 대전 유성구 KAIST 본원에서 만났다.
김 교수는 삼성호암상 수상소감을 묻자 “소위 ‘한국의 노벨상’이라고 할 만큼 우리나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을 받게 돼 굉장히 영광스럽다”고 밝혔다.
삼성호암상은 1990년 이건희 선대회장이 이병철 창업회장의 인재제일 및 사회공헌 정신을 기려 제정한 상이다. 매년 ▷과학상(물리·수학부문, 화학·생명과학부문) ▷공학상 ▷ 의학상 ▷예술상 ▷사회봉사상 수상자를 선정해 각각 메달과 상금 3억원을 수여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도 지난해 호암재단에 10억원을 기부하는 등 4년째 개인 기부를 이어가며 삼성호암상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호암재단은 노벨상 수상자 등 국내외 각 분야 전문가 46명으로 심사위원회를 꾸려 작년 12월부터 총 3차에 걸쳐 심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다시 해외 석학 63명으로 꾸려진 자문위원회의 자문 평가를 받는 등 수상자 선정까지 4개월의 장대한 여정을 거쳤다.
김 교수는 “이제 더 이상 받을 상이 없을 거 같다. 우리는 보통 호암상을 일생의 마지막에 받는 상이라고 생각한다”며 “같이 연구했던 학생들과 동료 교수들 그리고 정밀공학 분야의 공동 연구자들에게 고마운 마음 뿐”이라고 말했다.
‘공학인재 양성’ 국가 숙원 품고 25세에 英 유학길

1978년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기계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1980년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과학기술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는 UN 산하 유엔개발계획(UNDP)의 지원을 받는 개발도상국 신세였다. 정부는 UNDP로부터 받은 장학금을 종잣돈 삼아 해외에 우수 인재들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 중엔 김 교수도 있었다.
그는 “당시 국가가 유학을 갈 학교까지 정해줬다”며 “공학인재 양성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 국가는 나를 항공기 설계로 유명한 영국 크랜필드 대학원으로 보냈다”고 회상했다.
1970~80년대 우리나라 산업 현장에서 쓰던 대부분의 공작 기계나 정밀 계측 시스템은 대부분 일본에서 들여온 것들이었다. 일본 공작 기계가 없으면 자동차 한 대, 선박 한 척 조차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없었다.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면 정밀 계측 분야 인재부터 키워야 했다. 과학기술 인재 양성에 목말라 있던 국가는 김 교수를 비롯한 청년 공학도들을 해외로 보냈다. 선진 기술을 습득한 그들이 돌아와 모국의 산업 발전에 기여해주길 고대했다.
日에 의존한 정밀계측 기술 국산화로 ‘기술 독립’ 앞장

국가의 염원대로 김 교수는 크랜필드 대학원에서 정밀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84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만 29세에 KAIST 기계공학과 교수가 됐다.
펨토초 레이저로 초정밀 광계측 분야를 개척한 김 교수의 연구 성과는 반도체·디스플레이 생산공정과 인공위성 간 거리를 측정하는 우주 산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
김 교수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불량 검사를 할 때 과거엔 해외 기술에 많이 의존했지만 이제 우리나라도 세계적인 수준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2005년 이후 20여 년간 초정밀 계측을 위한 원천 기술을 개발해 지적재산권을 확보하고 이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산업체에 공급해왔다”며 “기술 개발과 인력 양성을 통해 우리나라 초정밀 산업 발전을 위한 기반을 구축했다”고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김 교수는 약 70명의 박사를 키워냈다. 그의 제자들은 현재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부터 대학교와 정부 출연연구기관 등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노벨상 가능성 현재 안 보여…과학기술 키우려면 정치는 지원만”

반도체를 비롯해 전 산업군에서 글로벌 첨단 기술 패권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갈수록 이공계 인재 유출을 걱정하는 처지다. 의대 쏠림으로 인한 기초과학의 위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김 교수는 지난해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을 강하게 비판하며 과학기술인들에게 보다 폭넓은 권한을 주고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과학기술을 육성하려면 정치는 지원을 하고 세부 사안의 결정은 과학기술인들에게 맡겨야 한다”며 “과학기술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시시콜콜 개입하다보니 (R&D 예산 삭감 같은) 사태가 생겼다고 본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국내 과학 분야에서도 노벨상 수상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김 교수는 “현재로선 노벨상을 탈 만한 사람이 안 보인다는 것이 과학계의 중론”이라며 “우리나라는 아직 과학 커뮤니티에서 힘이 약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미국, 중국, 유럽은 전쟁하듯이 자신의 연구 성과를 강하게 프로모션(홍보)한다”며 “우리나라 과학계도 국제 공동연구를 많이 하고, 기초연구에도 많은 국가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985년 부임 이후 올해로 40년째 KAIST에 몸 담고 있는 김 교수는 앞으로 연구 성과를 정리한 책을 발간하고,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외부 강연활동도 활발히 펼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달 30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리는 삼성호암상 시상식에는 그의 가족들도 동행한다. 미국에서 일하고 있는 김 교수의 두 아들도 아버지의 삼성호암상 수상을 직접 축하하기 위해 한국을 찾을 예정이다.
joz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