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경북 구미시 도리사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 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고령화 시대에 접어든 요즘 파크 골프가 대중 스포츠로 대세를 굳혀가는 듯하다. 사찰에서도 파크골프 대회를 개최해 포교 영역을 확장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에 진심인 이가 김천 직지사 교구장을 역임한 법등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구미 도리사 회주로 계신다고 해 법등 원로스님(세수 78세)을 뵐 수 있을까 해 그곳으로 향했다.
신라 최초의 절로 알려진 도리사는 그 이름과 관련된 창건 설화가 있다. 아도화상이 겨울인데도 이곳에 복숭아꽃과 오얏(자두)꽃이 활짝 핀 모습을 보고 좋은 터임을 알고 절을 짓고 이름을 복숭아와 오얏에서 이름을 따 도리사(桃李寺)라 했다고 한다. ‘오얏나무 밑에서는 갓끈을 고쳐 매지 말라’는 속담속의 오얏나무는 자두의 순우리말이며 복숭아나무와 함께 대부분 4월 초에 꽃을 피운다. 복숭아 자두가 한창 꽃 피울 때 방문했는데 도리사에선 이미 한겨울에 피고 졌는지, 아니면 화려한 초파일 연등에 가렸는지 꽃을 찾질 못했다.

우리나라 불교는 삼국시대 초기 중국을 거쳐 고구려, 백제, 신라에 전파됐다. 고구려 소수림왕 372년에 중국 전진(前秦)에서 온 승려 순도가 한반도에 처음 전했다고 해 우리나라 불교 역사를 1700여년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과 그의 오빠 장유화상에 의해 330여년 이상 빨리 가야를 통해 불교가 들어와서 그 역사가 2000년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
백제는 384년 동진(東晉)의 마라난타 스님이 영광 법성포로 들어와서 불갑사 창건으로 시작됐다. 3국 중에 가장 늦은 신라는 417년에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태조산 도리사 창건으로 불교 전파가 시작됐고,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국교로 공인했다.
도리사 주차장에서 옆길로 50여m 가면 먼 산과 들판, 낙동강 줄기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서대(西臺)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 그 옛날 아도화상이 황악산 아래 명당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절을 짓도록 했는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라고 해 직지사(直指使)라 했고 418년에 창건됐다고 알려진다. 이렇듯 불교는 삼국시대에 국가의 통합과 왕권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급속히 민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도리사는 땅이 실제 넓어서일까.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인 일주문이 사찰에서 5㎞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고, 정면에 ‘동국 최초 가람 성지 태조산 도리사’(東國最初伽藍聖地太祖山桃李寺)라는 긴 편액이 걸려 있다.
신라 처음 절 도리사

신라시대 최초의 사찰로 전해지는 도리사는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의 최고봉이 692m인 냉산(冷山, 일명 태조산) 아래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8교구 직지사 말사이다.
신라 눌지왕(417년) 때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중국 위나라에서 득도하고 불교가 없었던 신라에 와서 포교를 위해 모례 장자(長者, 큰 부자)의 굴실에 머물며 불법을 전파했고 모례장자와 그의 여동생은 신라 최초의 남녀 불자가 됐다. 아도화상이 수행처(절터)를 찾기 위해 다니던 중 겨울인데도 이곳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활짝 핀 모습을 보고 성스러운 길지임을 알고 이곳에 모례장자의 시주로 절을 짓고 이름을 도리사(桃李寺)라 했다.
기록에는 아도화상이 절터를 찾아 떠나며 모례에게, “칡넝쿨이 집 담을 넘어오거든 그 넝쿨을 따라오면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요”라는 말을 남겨 몇 년 후 집 담을 넘어온 넝쿨을 따라가자 아도화상이 바위 위에서 정진하고 있었다고 한다.

도리사 화엄석탑 아래 남쪽 비탈진 소나무 숲 언덕에 아도화상이 정진했다는 ‘좌선대’가 있고, 그 옆에는 칡넝쿨 설화를 그린 동판이 배치돼 있다.

‘아도화상 좌선대’ 앞에는 나란히 서 있는 두 비석 ‘아도화상사적비’(阿道和尙事蹟碑)와 ‘불량답시주질비’(佛糧畓施主秩碑)가 있다.

3m 높이의 아도화상사적비는 1655년에 세운 것으로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한 사적을 적은 것이며, 뒷면에는 상서로운 구름을 뜻하는 자운비(紫雲卑)가 음각되어 있는데 중수 시 내역과 공덕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크기가 훨씬 적은 ‘불량답시주질비’는 도리사에 논밭을 시주한 이의 이름과 규모를 적은 비석이며 1712년에 세웠다고 한다.
창건 이후 구체적인 역사는 전하지 않고 있으나 도리사 극락전 앞에 있는 보물 ‘화엄석탑’은 고려시대 유물로 알려져 있고, 고려 말 성리학자 길재(吉再)가 1363년에 냉산(冷山) 도리사에서 글을 배웠다고 하며, 조선 전기 대학자인 김종직(金宗直)은 도리사를 유람하고 시문을 남겼다는 기록이 있다.

1645년에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을 조성하였으나 1677년 큰 화재로 금당암과 아미타불 좌상을 제외하고 대웅전을 비롯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다. 1729년 아미타불상을 개금(改金)해 금당암으로 옮겨 봉안하고 금당암을 도리사로 개칭했다. 1876년(고종 13년)에 극락전을 중건해 아미타불 좌상과 후불탱을 봉안했다. 기존의 도리사는 불타고 근방에 있던 금당암이 도리사가 된 것이다.
아도화상과 8대 적멸보궁, 그리고 도리사

1976년에 도리사는 사찰을 수리하다가 화엄 석탑 뒤 석축에서 아도 화상으로 추정되는 석상(石像)을 발견했다. 1977년에는 1743년에 건립한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을 해체·복원하면서 금동 육각 탑 형태를 띤 사리함(金銅六角舍利函)과 석가모니 진신 사리(眞身舍利) 1과가 발견됐는데, 이 사리의 발견으로 도리사가 재조명되는 계기가 됐다.

극락전 뒤 태조선원과 삼성각 사이에 있는 높이 1.3m의 석탑은 석종형 부도(浮屠)를 닮았다고 해 ‘석종형 세존사리탑’(石鍾形 世尊舍利塔)이라고 한다. 최상층부에는 아래에 앙련을 새기고 그 위로 다섯 개의 원을 마련해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이라는 글자를 한 자씩 새겼다.

이 사리탑에서 8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육각사리함’과 그 안에 담긴 사리가 발견된 것이다. 발견된 사리는 무색투명하고 둥근 콩알 크기의 큰 사리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가치 있는 사리로 평가된다고 한다. ‘금동사리구’는 국보로 지정됐고 도리사는 1982년에 주지 법등(法燈) 스님이 진신 사리 친견을 위한 적멸보궁을 신축했다. 이로써 도리사 적멸보궁은 우리나라 8대 적멸보궁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을 말한다. 따라서 불상을 별도로 모시지 않고, 법당의 뒤쪽에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을 조성해 법당 안에서 사리탑을 향해 예배를 올린다.

도리사 적멸보궁은 설선당 뒤편 도리사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마련돼 있고, 적멸보궁 법당 안에서 바라보이는 석가여래사리탑은 세존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 1과를 봉안하기 위해 조성했다.

8m 높이의 석가여래사리탑은 사리탑 주변을 탑돌이 할 수 있도록 개방돼 있다. 팔각원당형부도를 본따서 만들었는데 기단에는 용을 조각하고 탑신에는 사천왕상을, 상륜부에는 여래상을 조각하는 등 전체적으로 화려하다.

적멸보궁에서 태조선원 방향으로 조금만 내려오면 너른 평지에 책을 펼친 아도화상 흉상이 자리하고 있다. 아도화상이 신라에 최초로 향(香)을 전했고, 그 향을 일주일간 피워 부처님께 기도하며 신라의 성국공주의 병을 낫게 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이를 상기시키듯 향을 피워 올리도록 제단이 마련돼 있다. 신라에 향 문화를 전한 ‘아도화상의 향 이야기’는 신라불교 초전지(불교가 처음 전래된 곳)로서 도리사의 또 다른 문화유산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화엄석탑과 태조선원

연등이 화려하게 펼쳐진 극락전 앞뜰에는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동일한 유형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특이한 형태의 고려시대 석탑이 있다. 3.3m 높이로 그다지 높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5개 층을 이루고 있는, 보물로 지정된 ‘화엄석탑(華嚴石塔)’이다.

탑을 받치는 기단인 맨 아래층은 길고 네모난 돌 여러 장을 병풍처럼 둘러 세워 전체 크기에 비해 불균형하게 보일 정도로 매우 높다. 기단 위의 탑신부는 작은 정사각형의 돌을 2∼3단으로 쌓아 마치 벽돌로 쌓은 석탑인 전탑의 양식을 모방한 것처럼 보이는 뭉툭한 특이한 모양새다.
‘화엄석탑’앞에 있는 ‘서방극락정토’를 관장하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 ‘극락전’은 1870년 중건된 경복궁 근정전의 공포(栱包) 구성 양식과 유사한 조선 말기 건축특징을 갖췄다고 한다. 건립연대는 알 수 없지만 1875년 중수했다고 알려지며, 내부에는 1645년에 조성한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1876년에 조성한 아미타 후불탱을 봉안하고 있다.

극락전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높이 129㎝, 무릎 너비 93㎝로 몸에 비해 머리가 크며 평면적이고 네모진 얼굴을 하고 있다. 17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조선 후기 목조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극락전 앞에는 스님들이 수행하는 선방인 태조선원(太祖禪院)이 ‘ㄷ자’형 건물로 놓여있다. 정면에 태조선원 도리사(太祖禪院 桃李寺)의 현판이 걸려 있다.
태조선원 현판 글씨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었던 오세창 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성철(性徹) 큰스님도 이곳에서 정진했다고 하며 예전에 이곳에서 고시 공부를 했던 이가 검찰총장까지 됐다는 설명도 있다.

요즘에도 절에서 고시 공부하는 이들이 있을까. 맞은편에 있는 수선료는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와 종무소, 공양간으로 쓰이는 2층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큰 규모이다.


태조선원에서 보면 단층 건물로 보이는 정면에 동국최초가람(東國最初伽藍), 태조산도리사(太祖山 桃李寺) 편액이 걸려 있다.

도리사에서 가장 큰 2층 건물이 초입 안마당에 자리하고 있는데, 1층은 보은전(報恩殿)이고 2층은 설선당(說禪堂)이다. 설선당은 각종 법회나 모임을 하는 강당으로 사용하는 곳이며, 평생 위패를 봉안한 보은전은 봉안된 영가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재(齋)를 지내는 곳이다. 이날도 어느 영가의 49재를 지내는지 몇 시간 동안 염불 소리가 이어진다.

도리사엔 참배객들이 차를 즐기며 독서도 할 수 있는 일종의 휴게실인 반야(般若) 쉼터가 특이하고 이곳에 조그마하게 붙은 ‘사단법인 아도문화 진흥원’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아도화상은 도리사의 출발이자 전부인 듯하다.
일정이 바쁘신 법등 회주스님도, 보은전에서 재를 지내고 계시는 묘원 주지 스님도 못 뵙고, 복숭아와 자두꽃도 비록 찾지 못했다.

하지만 낙동강 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서대(西臺)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을 맞으며, 제철 만난 듯 흐드러지고 있는 벚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도리사에 온 보람을 느낀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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