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인물편. 빅토린 뫼랑(& 에두아르 마네)]

가장 유명한 누드화 모델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일부 확대), 1863, 캔버스에 유채, 208x264.5cm, 오르세 미술관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일부 확대), 1863, 캔버스에 유채, 208x264.5cm, 오르세 미술관
에두아르 마네, 빅토린 뫼랑의 초상, 1862, 캔버스에 유채, 42.9x43.8cm, 보스톤 순수미술 미술관
에두아르 마네, 빅토린 뫼랑의 초상, 1862, 캔버스에 유채, 42.9x43.8cm, 보스톤 순수미술 미술관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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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누드화 논란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1863, 캔버스에 유채, 208x264.5cm, 오르세 미술관
마네 또한 원래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구성할 때 나체 여인까지는 등장시킬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센강에서 멱을 감는 여인을 본 후 영감이 떠올랐고, 이에 보다 파격적인 실험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1863, 캔버스에 유채, 208x264.5cm, 오르세 미술관 마네 또한 원래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구성할 때 나체 여인까지는 등장시킬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센강에서 멱을 감는 여인을 본 후 영감이 떠올랐고, 이에 보다 파격적인 실험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건 정말 미쳤다.

이날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본 모두가 이렇게 생각했으리라. 1863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낙선전(Salon des Refuses). 전시는 이름부터 희한했다. 이는 당시 미술가의 등용문, 살롱전 탈락자를 위한 행사였다.

사람들은 기대 없이 이곳을 찾았다.

출품작 상당수는 실제로 별 볼 일 없었다. 하지만, 어떤 졸작도 마네의 그림만큼 깊은 조소(嘲笑)를 이끌지는 않았다. 이토록 천박한 누드화를 예술이랍시고 선보이는가. 작품 앞 몰려든 관람객의 한탄이었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빅토린 뫼랑 중심으로 확대), 1863, 캔버스에 유채, 208x264.5cm, 오르세 미술관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빅토린 뫼랑 중심으로 확대), 1863, 캔버스에 유채, 208x264.5cm, 오르세 미술관

특히나 나체 여자.

화폭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있는 벌거벗은 여성. 그림 속 가장 큰 논란 대상은 이 여인이었다. 관람객은 캔버스 위 그녀의 당당한 눈빛 앞에서 분노했다. 뭣도 아닌 주제에 뭐라도 되는 양 있는 데 대해 손가락질했다. “저 여자, 화가의 상상이 아니라 진짜 사람이래요!” 이 말이 돌자 비난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애석하지만, 아직은 그런 시대였다.

당시 프랑스 미술계는 ‘살아 숨 쉬는’ 평범한 여인이 누드화 모델로 나서는 일을 좋게 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첩, 기녀, 창부…. 속살을 보이고 자세를 잡는 여인은 이런 말도 감당해야 했다.

마네는 이 그림 탓에 예술계의 반동으로 찍힌다.

악평이란 악평은 다 받는다. 그랬던 그는… 놀랍게도 끝내 이 문제작을 시작으로 미술계의 새로운 장을 연다. 전통 문법을 부쉈다는 비난은 쑥 들어가고, 모더니즘 선구자 내지 인상주의 창시자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만 붙는다.

여기까지만 쓰면 이를 예술계에선 익히 알려진 실화이자, 위대한 화가라면 종종 겪곤 하는 ‘반전 스토리’ 중 하나로 소개할 수 있다.

잊힌 ‘풀밭 위 그 여자’

빅토린 뫼랑
빅토린 뫼랑

하지만 마네의 이 이야기를 할 때 많은 사람이 빠트리는 부분이 있다.

누드 모델의 정체다. 과감하면서도 당돌하기까지 한 그녀가 없었다면, 마네의 혁명은 있을 수 없었다.

마네를 위해 나체로 풀밭을 거닐어준 여인의 이름은 빅토린 뫼랑이었다.

사실 빅토린이야말로 마네가 나선 횃불의 불씨가 된 여성이자, 끝없는 타오름으로 성공의 깃발까지 꽂게 앞장선 주인공이었다. 마네의 극적인 여정에 묻히긴 했지만, 그렇게 내내 가려져 있기에는 아까운 인물이었다.

이번에는 그녀, 빅토린의 시선으로 당시 시대를 조명하고자 한다.

이것은 ‘풀밭 위 그 여자’, 나아가 곧 ‘침대 위 그 여자’로도 불리게 될 여인을 따라 그때의 예술 혁명을 새롭게 풀어보는 글이다.

이미 ‘모던’했던 그녀

에두아르 마네, 기타 연주자, 1866년경, 캔버스에 유채, 63.5x80cm, Hill-Stead Museum
빅토린 뫼랑이 직접 기타를 들고 자세를 잡았다고 한다.
에두아르 마네, 기타 연주자, 1866년경, 캔버스에 유채, 63.5x80cm, Hill-Stead Museum 빅토린 뫼랑이 직접 기타를 들고 자세를 잡았다고 한다.

우선 시간을 거슬러 빅토린의 삶부터 짚어본다.

빅토린은 1844년 파리에서 세상 빛을 봤다. 당시 파리 미술계는 격변의 전야(前夜)를 맞고 있었다. 돌고 돌아 재차 위세를 떨친 명징한 신고전주의, 더 극적인 표현을 내건 낭만주의가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천사도 보여야 그려줄 수 있다’는 말로 요약되는 사실주의가 이들 사이에서 틈을 노리는 모습이었다. 어수선했다. 난세라면 난세였다. 무슨 사건이든 터지기에 딱 좋은 시대였다.

청동 장인의 딸로 태어난 빅토린은 핏줄 덕일까.

그녀는 어릴 적부터 예체능에 소질을 보였다. 그림도 곧잘 그리고, 기타와 바이올린 등 악기 연주에도 능했다. 열여섯 살인 1860년부터는 토마 쿠튀르의 화실에서 모델 일도 하기 시작했다. 쿠튀르는 당시 권위 있는 로마상(Prix de Rome)도 받은 적 있는 까다로운 기질의 화가였다. 그런 쿠튀르 눈에 들 만큼, 그녀에게는 몸을 쓰는 데도 감각이 있었던 모양이다.

에두아르 마네, 숙녀와 앵무새, 1866, 캔버스에 유채, 185.1x128.6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 또한 모델은 빅토린이다.
에두아르 마네, 숙녀와 앵무새, 1866, 캔버스에 유채, 185.1x128.6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 또한 모델은 빅토린이다.

표정과 동작으로 감정을 보이는 데 흥미를 느낀 건지, 그녀는 관심의 추를 모델 쪽으로 옮긴다.

빅토린에게는 모델로 강점이 있었다. 그녀는 화가에게 그리는 재미를 주는 여인이었다. 얼굴로도, 몸매로도 그랬다. 그녀는 생기 있는 적갈색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반항기 섞인 눈매와 형형한 안광도 품고 있었다. 빅토린의 별명은 ‘새우’였다. 작은 몸짓 탓에 생긴 말이라고 하지만, 이는 그녀가 품은 큼직한 곡선과도 잘 어울리는 별칭이었다.

“모든 부위가 섬세한, 파리지엔 특유의 ‘신경질적인’ 몸을 갖고 있다. 엉덩이의 조화로운 선이 압권이며, 우아하면서도 나긋나긋한 가슴 또한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였다.”

빅토린 뫼랑에 대한 평가

실제로 이런 평가까지 나왔으니. 그뿐인가. 그녀는 센스도 있었다. 주연이 될 줄도 알았고, 엑스트라로 녹아드는 법도 이해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를 더 특별한 모델로 만드는 건 행동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었다.

빅토린은 섬세하고도 단호했다. 때로는 걸걸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씩씩한 면을 갖췄다. 다른 모델처럼 애써 예쁜 척하지 않고, 굳이 화려한 옷만 입지 않았다.

“맥주 홀의 바람기 많은 여자.” “그녀는 역마살이 낀 자유분방한 여인이었다. (…) 눈빛은 신비롭지만, 표정은 매정한 어린아이 같을 때가 많았다.”

귀스타브 제프루아(Gustave Geffroy)

당시 미술 비평가 귀스타브 제프루아가 그녀에 대해 이런 글까지 쓸 정도였다. 이는 천성일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을 깔보는 업계 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갈고닦은 성향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문제아 듀오 결성

토마 쿠튀르, Romans during the Decadence, 1847, 캔버스에 유채, 472x772cm, 오르세 미술관
토마 쿠튀르, Romans during the Decadence, 1847, 캔버스에 유채, 472x772cm, 오르세 미술관

마네가 그런 빅토린의 삶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기민한 그가 빅토린의 떡잎을 알아본 것이다.

훗날 둘의 작당 모의가 미술계를 뒤집어서일까.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을 놓곤 몇 가지 이야기가 있다. 가장 유명한 건 ‘길거리 캐스팅’설이다. 1862년께. 기타를 치고, 내키면 노래도 부르며 거리를 쏘다닌 빅토린을 마네가 우연히 봤다는 말이다. 그 자유로운 기질에 홀린 마네가 모델 제의를 했다는 이야기다. 다만 비슷한 시기에 빅토린과 마네가 쿠튀르의 화실에서 처음 인연을 맺었다는 말도 있다. 마네 또한 쿠튀르의 제자였던 만큼, 앞 사례와 비교해선 개연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밖에 어쩌다 법원 복도에서 만났다는 설도 있긴 하다.

무슨 일화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둘의 대면을 운명적 만남이라고 표현한 데는 이유가 있다.

둘 사이 성격은 닮지 않았지만(따지자면 마네는 빅토린보다 상당히 여린 축에 속했다), 예술의 지향점만에서는 포개지는 면이 많아보였다. 일단 마네는 지금 격동의 시기에 어울리는 새로운 양식 내지 기법을 갈망했다. 관습, 전통, 통념…. 지겹도록 부르짖는 낡은 개념 말고 시도, 변화, 혁신과 같은 요즘 단어에 꽂혀 있었다. 옛 굴레에서 벗어나고, 우리는 우리만의 현실을 새롭게 비춰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엄밀히 보면 빅토린이 마네의 그 정신에 백 퍼센트 공감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껏 보인 틀을 깨는 기질 내지 행실로 미뤄보면…. 적어도 ‘비슷한’ 각도의 가치관을 따르고 있었던 건 확실하다.

에두아르 마네, 압생트를 마시는 남자, 1859, 캔버스에 유채, 180.5x105.6cm, Ny Carlsberg Glyptotek
멍한 표정의 남자가 있다. 곁에는 ‘녹색의 요정’으로 불린 압생트가 채워져 있다. 빈 술병은 아무렇게나 굴러다닌다. 마네 나름대로는 현실을 관통하는 회심의 그림이었지만, 그가 받아든 건 탈락 통보밖에 없었다. 당시 살롱전 심사위원 중에는 마네의 스승이었던 토마 쿠튀르도 있었다.
에두아르 마네, 압생트를 마시는 남자, 1859, 캔버스에 유채, 180.5x105.6cm, Ny Carlsberg Glyptotek 멍한 표정의 남자가 있다. 곁에는 ‘녹색의 요정’으로 불린 압생트가 채워져 있다. 빈 술병은 아무렇게나 굴러다닌다. 마네 나름대로는 현실을 관통하는 회심의 그림이었지만, 그가 받아든 건 탈락 통보밖에 없었다. 당시 살롱전 심사위원 중에는 마네의 스승이었던 토마 쿠튀르도 있었다.

물론 둘 사이에는 다른 점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이 걸어온 삶이 그랬다. 빅토린은 이런 면 덕에 당찬 매력을 품은 한편, 마네는 그 기질 탓에 여태껏 고행길을 걸어와야 했으니.

빅토린을 알게 된 무렵 마네는 관습을 중시하는 스승 쿠튀르와 몇 번이고 싸운 상태였다. 몇 해 전 살롱전(쿠튀르도 심사위원으로 나섰던)에서는 야심 찬 실험작도 냈지만, 이 또한 보기 좋게 낙방했다. 그 그림은 <압생트를 마시는 남자>. 현실적인, 너무도 현실적인 그의 화폭 속 사실적인 술꾼은 과거 아름다운 신과 영웅, 요정이 판치는 출품작들 속에서 기를 펴지 못했다.

‘나를 써먹어 보세요.’

이런 상황에서 빅토린은 존재 자체로 마네에게 텔레파시를 쏘는 여인이었으리라.

실제로 빅토린은 마네의 실험에 몇 번이고 기꺼이 응했다. 둘의 의기투합은 이들 사이 초기작 두 점으로 짐작할 수 있다.

에두아르 마네, 길거리 가수, 1862, 캔버스에 유채, 174x118cm, 보스톤 순수미술 박물관
에두아르 마네, 길거리 가수, 1862, 캔버스에 유채, 174x118cm, 보스톤 순수미술 박물관

먼저 <길거리 가수>가 그렇다.

기타를 든 빅토린이 카페 공연을 마친 후 다음 행사장으로 가고 있다. 그녀는 걸음을 재촉하는 와중에도 한 포장지를 소중하게 품는다. 거기에는 체리가 있다. 여간 배가 고팠는지, 다음 일정까지 시간이 없는지 이를 입에 갖다 대고 있다. 그녀는 당당하다. 걸으며 뭘 집어먹는 모습을 보이면 “천박하다”는 조롱이 쏟아지는 시대였지만, 그따위 통념에는 개의치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그림에도 쓸모없는 체면은 버리고, 당장에 더 집중하라는 메시지가 담겼다고도 볼 수 있다.

에두아르 마네, 에스파다 옷을 입은 빅토린, 1862, 캔버스에 유채, 165.1x127.6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에두아르 마네, 에스파다 옷을 입은 빅토린, 1862, 캔버스에 유채, 165.1x127.6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빅토린이 여성 투우사로 나선 <에스파다 옷을 입은 빅토린>은 어떠한가.

투우 시합장에 선 빅토린은 늠름한 자태로 바깥세상과 눈을 맞춘다. 이 또한 ‘여성은 조신해야 한다’는 인식에 젖은 과거와의 단절 필요성을 말하는 건 아닐지.

“젊은 여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옷, 어울리지 않는 놀이다. (…) 잼을 만드는 여성과 황소를 죽이는 여성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전자가 아니겠는가.”

<에스파다 옷을 입은 빅토린>에 대한 한 평가.

한 평론가는 그림을 놓고 이렇게 썼다. 투우사, 이보다 앞서 투사부터 되기로 한 듯 결연한 빅토린의 얼굴을 보라. 누구보다도 빅토린이 이 글에 비웃음을 흘리지 않았을까 한다.

둘은 몇 차례 호흡을 맞췄다.

이들은 서로가 화가와 모델로서 환상의 짝꿍이자 문제아 듀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드디어 일을 벌인다. 당시 미술계의 심장부, 살롱전을 향해 폭탄을 던진다. 그게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출품이었다. 이때 마네는 서른한 살, 빅토린은 이보다 열 살은 넘게 어린 나이였다.

왜 그렇게까지 가혹했는가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Study), 1863, 캔버스에 유채, 89.5x116.5cm, Courtauld Institute of Art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Study), 1863, 캔버스에 유채, 89.5x116.5cm, Courtauld Institute of Art

사실 마네도 마네지만 빅토린이야말로 <풀밭 위의 점심 식사>로 어디서든 싸늘한 시선을 받아야 했다.

예술가나 평론가가 모인 식당에는 발도 제대로 내밀 수 없었다. 어쩌다 고약한 무리에게 둘러싸이면 갖은 저질스러운 야유를 감당해야 했다.

마네야 기획자 겸 창작자인 만큼 그렇다고 해도, 빅토린까지 그토록 가혹한 상황을 맞은 건 왜일까.

문제아로 찍힌 화가 앞에서 헤프게 옷을 벗었다는 단순한 비아냥도 있었지만, 더 복잡한 이유도 있었다. 이는 앞서 쓴 당시 시대가 ‘살아 숨 쉬는’ 보통의 누드화 모델을 선호하지 않았다는 말과 재차 맞물린다.

그 시절 예술계는 세상을 아름다운 고전너저분한 현실로 나눠 보고 있었다.

그림도 역사화와 신화화를 최고로 쳤다. 이상적 교훈이 있으면 더 좋은 식이었다. 이 인식에 따르면 누드화 모델 또한 아리따운 신 내지 님프 정도여야 가치가 있었다.

알렉상드르 카바넬, 비너스의 탄생, 1863, 캔버스에 유채, 130x225cm, 오르세 미술관
알렉상드르 카바넬, 비너스의 탄생, 1863, 캔버스에 유채, 130x225cm, 오르세 미술관

같은 해 살롱전에서 1등 상을 탄 알렉상드르 카바넬<비너스의 탄생>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선정성만 따지고 볼 때, 이 그림은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수위가 높다. 그럼에도 논란은커녕 찬사만 나왔다. (완성도는 차치하고)배경이 이세계였던 덕이었다. 모델도 인간이 아닌 미의 여신, 비너스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빅토린은 이런 숨 막히는 풍토에 ‘인간’ 누드화 모델로 나선 격이었다. 비너스와 비교해선 결코 완벽할 수 없는 현실 몸매를 훌렁 내보이며. 미술계는 이를 우리네 권위에 대한 도발이자 모욕으로 간주했다.

더는 과거처럼 이상적이고, 목가(牧歌)적인 모습만 그릴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자.

마네의, 빅토린의 반항은 이 문장으로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정신은 포화에 휩싸인 채 사그라드는 듯했다. 그렇다면 둘의 담대한 여정도 끝이었는가. 아니었다. 이들은 살롱전에 대고 또 한 번 폭탄을 투척했다. 이번 건은 더 노골적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더 파격적이었다. 새로운 폭탄의 이름은 <올랭피아>였다.

또 다른 폭탄, ‘올랭피아’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 캔버스에 유채, 130x190cm, 오르세 미술관
빅토린과 함께 등장하는 흑인 하녀의 실제 이름은 ‘로르(Laure)’다. 당시 회화 속 흑인 하녀는 대개 식민지 노예와 같은 이미지로 그려졌는데, 마네의 그림 속 그녀 모습은 그렇게까지 남루해보이지 않는다. 이 또한 관람객이 그림을 보기에 어색한 장면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마네는 <올랭피아>까지 혹평을 받자 진심(!)으로 풀이 죽었다고 한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 캔버스에 유채, 130x190cm, 오르세 미술관 빅토린과 함께 등장하는 흑인 하녀의 실제 이름은 ‘로르(Laure)’다. 당시 회화 속 흑인 하녀는 대개 식민지 노예와 같은 이미지로 그려졌는데, 마네의 그림 속 그녀 모습은 그렇게까지 남루해보이지 않는다. 이 또한 관람객이 그림을 보기에 어색한 장면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마네는 <올랭피아>까지 혹평을 받자 진심(!)으로 풀이 죽었다고 한다.

“검은 고양이와 함께 있는 저 미개한 비너스는 시신처럼 침대 위에서 완전히 벌거벗고 있다.”

“더러운 손과 주름진 발을 가진 매춘부가 (…) 시체처럼 검푸른 빛을 품고 있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도 미쳤지만, <올랭피아>도 평론가들이 들개처럼 물어뜯은 미친 그림이었다.

빅토린은 풀밭에서 벗어나 이번에는 침대 위에서 알몸을 한껏 보인다. ‘풀밭 위 그 여자’에서 ‘침대 위 그 여자’가 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빅토린은 그렇게 당하고도 또 한 번 투사의 눈빛을 보여준다. 늘 그랬듯 이번에도 부끄러움 따위 품지 않고 있다. 나체인 그녀는 당시 무희와 창부가 애용한 벨벳 끈을 둘렀다. 팔찌와 슬리퍼로 요염함을 더했다. 그러고선, 캔버스 밖 세상과 또 한 번 눈을 맞추려고 한다. 강렬하게, 필사적으로.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그녀는 비너스 흉내라도 내려는 양 몸을 길게 폈으나 단지 그뿐이다. 인간인 만큼 여신과 비교해선 팔다리도 짧고, 몸 곳곳에 군살도 있을 수밖에 없다. 올랭피아란 말도 언뜻 들으면 어감이 괜찮지만, 실제로는 당시 성매매 여성이 흔히 쓴 가명으로 치부될 뿐이었다.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캔버스에 유채, 119x165cm, 우피치 미술관
마네가 <올랭피아>를 그릴 때 참고한 그림 중 한 점이다. 구도와 구성으로 봤을 때는 큰 차이가 없겠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일단 이 그림 속 여인은 여신 비너스라는 걸 알 수 있다. 그것부터 큰 차이였다. 동물 또한 고양이가 아닌 강아지가 그려져 있다.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캔버스에 유채, 119x165cm, 우피치 미술관 마네가 <올랭피아>를 그릴 때 참고한 그림 중 한 점이다. 구도와 구성으로 봤을 때는 큰 차이가 없겠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일단 이 그림 속 여인은 여신 비너스라는 걸 알 수 있다. 그것부터 큰 차이였다. 동물 또한 고양이가 아닌 강아지가 그려져 있다.
올랭피아를 조롱한 릴뤼스트라시옹 만평,  1865(6월 3일)
올랭피아를 조롱한 릴뤼스트라시옹 만평, 1865(6월 3일)

마네는 1865년 <올랭피아>를 살롱전에 제출했다.

대체 왜 아름다움을 그리지 않는가. 이따위 쿰쿰한 현실을, 보정으로 가린 추악한 ‘진실’을 계속해 후벼파는 이유가 무엇인가. 관람객은 옛 공식을 재차 깨부순 이 그림에 발끈했다. 마네 지인이 남긴 기록을 보면 당시 험악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파리 당국의 (안전요원 투입)조치가 있어 그림에 구멍이 나는 일만은 막을 수 있었다.”

그랬다.

이번에도 파국이었다.

빅토린의 ‘이유 있는’ 변신

에두아르 마네, 철길, 1873, 캔버스에 유채, 93.3x111.5cm,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마네가 빅토린을 모델로 한 마지막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빅토린은 이 화폭 안에서도 특유의 진한 눈빛을 거두지 않는다.
에두아르 마네, 철길, 1873, 캔버스에 유채, 93.3x111.5cm,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마네가 빅토린을 모델로 한 마지막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빅토린은 이 화폭 안에서도 특유의 진한 눈빛을 거두지 않는다.

이 무렵 빅토린이 보인 뜻밖 행보도 흥미롭다.

소동이 있고 얼마 후, 빅토린은 분노로 타오르는 파리 미술계를 뒤로한 채 미국을 찾았다. 그런 뒤 1870년대 초에 파리 땅을 다시 밟았다. 이쯤부터 그녀는 모델 아닌 화가로 생을 새롭게 개척한다. 마네와 함께 파격을 몰고 온 빅토린이었지만, 정작 붓을 들고선 아카데미풍에 가까운 그림을 그렸다! 그녀는 심지어 그 기법으로 1876년 살롱전에서 입선도 했다(그해 마네가 낸 두 점은 모두 낙선했다). 상황이 그렇게 바뀐 만큼, 마네와는 거리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화가와 모델로는 최고의 궁합이었지만, 화가 대 화가로는 되레 라이벌 기류가 감돌았다.

빅토린 뫼랑, Orientalist scene with hookah smoker, 1876, 캔버스에 유채, 25x16.5cm, 개인소장
빅토린 뫼랑, Orientalist scene with hookah smoker, 1876, 캔버스에 유채, 25x16.5cm, 개인소장

빅토린은 왜 방향을 틀었을까.

수잔 발라동 등 여성 모델이 화가가 되는 사례야 그렇게까지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예술관까지 과거로의 회귀(回歸)를 택한 행보에는 의문이 남는다.

이는 살아남기 위한 전략적 행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는 사회 분위기상 여성 예술가란 인정받기 힘든 존재였다. 집안과 돈 등 환경이 괜찮으면 그나마 나았지만, 그녀는 이 또한 기대할 수 없는 처지였다. 마네는 법관과 외교관 집안의 아들이었다. 누가 봐도 인정하는 상류층이었다. 그런 그 또한 여러 도전작과 실험작 모두 성공시키지 못했다. …여자의 몸인 내가, 믿을 구석도 없는 내가 화가로 그 정신을 이어간들 꿈쩍이나 하겠는가. 빅토린은 이러한,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급진적 투쟁 대신 점진적 변화를 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빅토린 뫼랑, Jup
빅토린 뫼랑, Jup

빅토린은 1879년 살롱전에서도 입선했다. 이후로도 수상의 영광을 몇 차례 더 안았다. 이 또한 자기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용기, 마네와 멀어지는 일까지 스스럼없이 각오하는 야성이 있어 보일 수 있는 행보가 아니었을지.

그사이 격동의 세상은 또 한 번 출렁였다.

무엇보다도 희대의 문제작 <풀밭 위의 점심 식사><올랭피아>가 재조명을 받는, 그런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화가 아닌 과거의 모델 빅토린도 뒷심을 발휘하게 된 셈이었다.

언젠가부터 두 논란작 뒤로 젊은 예술가가 한 둘씩 슬금슬금 붙었다. 이들은 이 파격적 그림을 통해 현실, 나아가 진실까지 대면할 수 있었다. 이렇게도 그릴 수 있구나. 깨달음도 얻었다. 마네를 따르게 된 청년 이름은 클로드 모네였다. 오귀스트 르누아르였다. 알프레드 시슬레프레데릭 바지유 등이었다. 그렇다. 얼마 후, 인상주의자로 불리게 될 이들이다.

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1872, 캔버스에 유채, 48x63cm,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1872, 캔버스에 유채, 48x63cm,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랑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1876, 캔버스에 유채, 131x175cm, 오르세 미술관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랑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1876, 캔버스에 유채, 131x175cm, 오르세 미술관

새로움에 눈 뜬 똑똑한 청년들은 이 작품 덕에 용기를 쌓아 올린다. 저마다의 개성을 담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인상, 해돋이>가 탄생한다. <물랑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가 빛을 본다. 어느덧 뉴 노멀, 모더니즘(modernism)은 거부할 수 없는 미래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결국은 마네가 승리하고 말았다. 진작에 화가로 성공한 빅토린도, 또 한 번 재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빅토린이 있었다

이때부터 빅토린은 화가인 한편,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인간 누드화 모델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빅토린은 1903년, 프랑스 미술협회에도 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1906년에 파리를 떠나 콜롱브 교외로 간 그녀는, 1927년 3월 17일에 생을 마감했다. 당시 나이는 여든세 살이었다. 혁명가로 뒤늦게 인정받은 마네가 죽은 지 44년이나 흐른 시점이었다.

빅토린은 70대가 넘어서도 본인을 예술가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당연히 그럴 자격이 있지 않은가. 화가로 인정받고, 모델로도 눈부신 업적을 쌓았기에. 따지고 보면 현대의 전위 예술가 중 그녀 영향을 받지 않은 이가 없기에.

“괜찮아. 나에게는 빅토린이 있으니까.”

에두아르 마네

마네는 그가 점찍은 여성이 모델 제의를 거절하면 꼭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 또한 그처럼 말할 수 있다. “우리에게도 빅토린이 있었기에, 미술의 지평(地平)이 더 빨리 넓어질 수 있었다”고.

<참고 자료>

에두아르 마네, 질 네레, 마로니에북스

마네: 전통에 반기를 든 근대의 화가, 스테파노 추피, 마로니에북스

마네의 회화, 마리본 세종(엮음), 그린비

그리다, 너를, 이주헌, 아트북스

Manet, Manet, Edouard, Venturi, Marcello , Armiraglio, Federica, Random House Inc

빅토린 뫼랑, 자화상, 1876
빅토린 뫼랑, 자화상, 1876

기자의 말풍선

근 3년 전, ‘후암동 미술관’ 1편도 에두아르 마네 이야기였답니다.


yul@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