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신화편. 일리아스 3부작 下(트로이 전쟁⑦)]
편집자 주
그리스 로마 신화를 〈후암동 미술관〉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보듯 감상하세요. 기사는 여러 참고 문헌 기반에 흐름상 약간의 변형·생략,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미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좋아요’와 댓글은 콘텐츠 제작과 유통에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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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아킬레우스는 혈육과도 같던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죽은 후 전쟁에 다시 참전한다. 그는 절친을 죽인 트로이군 총사령관 헥토르에게 깊은 원한을 품는다. 오직 이 감정만을 앞세워 전장을 마구 휘젓는다.
그리고, 드디어 헥토르와 마주 선다. 각 진영을 대표하는 최강의 두 영웅은 기어코 일 대 일 대결을 펼칠 참이다.
갑작스러운 도망의 이유

그런데… 내가 여기서 죽으면 트로이는 어떻게 되는가.
헥토르는 오직 본인만 보고 맹진(猛進)하는 아킬레우스 앞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내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복수를 수백번이고 되갚겠다.”
아킬레우스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광기에 찬 그는 인간 같지 않았다. 그간 트로이군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머리카락부터 샌들까지 피 칠갑이었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 건 괜찮지만, 나 말고 저 괴물과 합이라도 맞출 수 있는 동료가 또 있는가. 없다. 한 명도 없다. 그렇다면 트로이의 운명도… 끝이다. 헥토르의 결론이었다.
이는 비약으로 보기 어려웠다. 실제로 헥토르는 그리스 연합군과 맞선 10여년간 전 분야를 총괄했다. 수치상 모든 게 열세였던 트로이는 그 덕에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헥토르는 본인 등 뒤 트로이성이 불바다가 되는 장면을 떠올렸다.
절규와 비명이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다. 헥토르의 눈앞이 하얘졌다. 평생 느껴본 적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공포였다. 아폴론이 이 감정을 부추겼다. 그는 헥토르를 너무도 사랑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살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헥토르는 도망치기를 택했다.
헥토르는 트로이성을 세 바퀴나 돌았다. 물론 아킬레우스도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 비겁한 놈!”
아킬레우스는 분을 못 이겨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제우스가 이 모습을 측은하게 보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헥토르는 그저 인간이었다. 신의 아들인 아킬레우스와 달리, 그 빛나는 능력과 인격 모두 스스로 갈고닦은 것이었다. 제우스는 헥토르에게 마음이 더 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헥토르를 살리고 아킬레우스를 죽일 생각도 했다. 그렇게 되도록 운명의 여신을 부추길 마음도 있었다. 때마침 그리스 연합군 편에 선 아테나가 “아무리 신이라고 한들 인간의 운명을 맞바꾸면 안 된다”고 경고해 무산되긴 했지만.
제우스는 다시 저울을 들었다.
한쪽에는 헥토르, 반대편에는 아킬레우스의 삶을 올렸다. 애석하게도 헥토르의 접시가 죽음을 향해 쑥 내려갔다. 제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소리를 들은 아테나는 망설임 없이 땅으로 내려갔다. 아테나는 헥토르의 형제 데이포보스로 변신했다. 도망치는 헥토르를 쫓아가 “어차피 승패는 신께서 결정하실 것”이라며 무모한 용기를 심어줬다. 헥토르는 아테나의 술수에 걸려들었다. 아폴론이 불어넣은 공포는 어느새 연기가 돼 사라지고 말았다.

“아킬레우스여.”
멈춰 선 헥토르는 뒤돌아 이렇게 외쳤다. 아킬레우스 또한 헥토르의 이런 모습에 뒤쫓기를 멈췄다. “신께서 이 싸움을 허락하셨다고 보고, 나도 이제 그대와 맞서겠소. 다만.” 헥토르는 아킬레우스가 창을 높이 드는 것을 보고 말을 덧붙였다. “누가 이기고 진들, 시신만은 상대편에 돌려보내도록 하는 게 어떻소? 장례라도 온전하게 치를 수 있도록.”
“나는 곧 내 손에 죽을 자와 흥정할 생각이 없소.”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제안에 코웃음을 쳤다. 오직 복수심뿐인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일 생각이었다. 시신 따위 형체도 남지 않게끔 찢을 작정이었다.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향해 창을 던졌다.
이는 헥토르의 목 힘줄을 향해 정확하게 날아갔다. 헥토르는 간발의 차로 공격을 피했다. 헥토르는 곧장 몸을 펴고 창을 들어올렸다. 아킬레우스에게 달려들어 이를 심장 쪽으로 꽂았다. 하지만,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아킬레우스의 방패가 이를 가볍게 막았다. 둘은 동시에 검을 뽑았다. 흙먼지가 세차게 일었다. 두 사람 다 낭떠러지 앞 황소 같았다. 상대의 어떤 타격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공기가 이토록 무겁지 않았다면, 이들은 서로의 실력에 경의를 표했을 터였다.
한참이나 뒤엉켰던 둘은 동시에 물러섰다.
둘 다 이를 갈았다. 땀을 닦고, 흘러내리는 입가의 피를 탁 뱉었다. 이들은 알고 있었다. 그다음 공격에, 누군가 한 명은 반드시 죽으리라는 점을. 헥토르는 칼을 바로 쥐었다. 자루가 벌써 헐거워져 있었다. 그래도 한 번, 딱 한 번은 더 내리칠 수 있었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 최후 일격을 가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신들마저 눈시울을 붉혔다

“꼭 가야 해요?”
시간을 거슬러 헥토르가 그리스 연합군과의 전투 중 잠시 트로이성으로 들어왔을 때. 당시 그는 메넬라오스와의 전투 중 갑자기 사라진 동생 파리스를 찾고, 그에게 “빨리 전장으로 나가라”며 재차 다그친 상태였다. 이어 헥토르 또한 다시 장비를 들고 전쟁터로 나서려고 하자, 아내 안드로마케가 그의 망토 자락을 붙잡고 한 말이었다. “당신은 총사령관이잖아요. 매번 앞장서려고 하지 말고 뒤에서 지켜보면 안 되나요?”라는 호소와 함께.
“그대는 내 남편이에요. 나에게는 아버지이자 어머니, 오빠이자 친구 같은 존재이기도 해요. 부디 성벽에 머물러주세요. 제발 저를 과부로, 당신 아들을 아비 없는 자식으로 만들지 말아주세요.”
안드로마케는 애원했다. 헥토르는 그런 안드로마케 앞에서 고개를 떨궜다. “…우리뿐 아니라, 모든 트로이의 전사들이 같은 상황일 것이오.” 이 말은, 안드로마케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는 의미였다. 헥토르는 떠나기 전 아들 스카만드리오스를 품에 안았다. 투구를 벗은 뒤 축원을 올렸다. 아들은 앙 하고 울었다. 이에 헥토르와 안드로마케는 잠시나마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여보. 내 아들아.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의 창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킬레우스는 칼을 들고 내달리는 헥토르 앞에서 장창을 꺼내들었다. 이는 아테나가 헥토르 몰래 아킬레우스 손에 쥐여준 장비였다. 아킬레우스의 청동창은 헥토르의 목을 깊이 파고들었다. 전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킬레우스여. 앞서 내가 한 제안을 생각해보게. 시신에 모욕만은 하지 말아줬으면 해.”
헥토르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죽은 자와는 흥정하지 않는다고.” “그래. 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 죽임을 당하는 날이 곧 올 것이야.” 헥토르는 이를 유언처럼 남긴 채 생을 마쳤다.

아킬레우스는 함성으로 본인의 승리를 알렸다.
아킬레우스는 원래 제 것이었던 헥토르의 투구와 갑옷을 벗겼다. 헥토르를 알몸으로 만들었다. 그는 창을 다시 들고 와 헥토르의 뒤꿈치를 뚫었다. 그 구멍에 줄을 넣고, 이를 자기 전차 끄트머리에 묶어버렸다. 아킬레우스는 죽은 그를 질질 끌고 트로이 성곽을 돌았다. 그렇게 보란 듯 능욕했다.

트로이 왕과 왕비, 즉 헥토르의 부모인 프리아모스와 헤카베는 이 모습을 보곤 거의 미쳐버렸다.
“남아있는 내 모든 아들이 헥토르를 대신해 죽었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프리아모스의 한탄은 진심이었다. 헥토르의 아내인 안드로마케도 충격에 쓰러졌다. 심지어 파리스로 인해 뜻하지 않게 전쟁의 도화선이 된 여인, 헬레네마저 통곡했다. 헥토르는 철없는 파리스를 타박할지언정 헬레네에게는 쓴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외려 신의 농간에 휘말린 데 대해 진심으로 함께 슬퍼할 뿐이었다. 헥토르는 이처럼 최고의 아들이자 남편, 장군이자 모두의 성자였다. “그는 사랑받아 마땅한 삶을 살았다.” 헥토르의 최후를 본 신들의 평가였다. 신들의 눈시울도 붉어져 있었다.
승자의 ‘만행’

아킬레우스는 죽은 헥토르를 매단 채 진지까지 왔다.
다만, 헥토르의 시신은 멀쩡했다. 아폴론과 아프로디테가 축복을 내린 덕이었다. 성질이 난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체를 개 우리에 던져버렸다. 하지만, 개들 또한 신들의 후광 탓에 이빨 한 번 대지 못했다. 아킬레우스는 그사이 헥토르에게 죽은 절친 파트로클로스의 장례를 치렀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기려 달리기, 창 던지기, 전차 경주 등 작은 올림픽도 열었다.

아킬레우스는 성대한 뒤풀이를 하고도 분을 풀지 못했다.
그는 수시로 전차를 끌었다. 밤낮 없이 달렸다. 헥토르를 묶어둔 채로.
“아킬레우스의 만행을 언제까지 두고 봐야만 합니까.”
트로이 편의 아폴론이 참지 못하고 올림포스 신들에게 따졌다. “아킬레우스는 여신 테티스의 아들이에요. 우리가 간섭할 존재가 아니에요.” 그리스 연합군 쪽에 선 헤라가 반박했다.
“헥토르는 트로이인 중 우리가 가장 사랑했던 인간이오.”
제우스가 이들의 논쟁에 끼어들었다. 트로이 전쟁 이후 신들 사이 빚어지는 갈등의 확전을 막으려는 모습이었다.
“내가 테티스에게 말하겠소. 신들이 당신 아들 아킬레우스의 해도 너무한 행동을 보고 노했다고 말이오. 서둘러 아킬레우스를 찾아 그 짓을 그만두게끔 말리라고 하겠소.”
제우스는 사실상 트로이 편을 들어줬다. 헤라와 아테나 등 연합군 편의 신들이 씩씩댔지만, 최강 신 앞에서 감히 대들 수 없었다.
자식 잃은 아버지는…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는 아들이 죽은 이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얼굴과 옷, 발바닥에는 오물이 묻어있었다. 종일 땅을 치고 그 위에서 몸부림친 탓이었다.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가 그런 프리아모스를 찾아왔다. 그녀 모습에 모든 이가 몸서리를 쳤다. 노인을 저승에 데려가기 위해 온 게 아닐까 하는 공포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리스가 프리아모스에게 꺼낸 말은 의외였다.
“트로이 왕이시여. 나는 제우스의 음성을 전달하기 위해 왔어요.” 프리아모스는 이 말에 통곡을 멈췄다. “헥토르의 몸값을 챙기세요. 아킬레우스의 진지로 늙은 시종 한 명과 나귀, 수레를 데리고 가세요. 그를 설득해 헥토르의 시신을 받아오세요.” 이리스는 프리아모스의 대답도 듣기 전에 사라졌다.

프리아모스는 일어섰다.
궁을 돌며 값비싼 보물을 모조리 챙겼다. “수상하다”는 아내 헤카베의 경고를 등진 채 시종을 불렀다. 남은 자식들의 염려도 뿌리친 채 수레에 올랐다. “아버지. 정 그렇다면 저희도 함께 가게 해주십시오.” “신은 나와 시종만을 원하셨다.” “아버지….” “잔말 말고 보물이나 수레로 마저 옮기거라.” 프리아모스는 이미 혼이 나가있었다. 그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늦은 밤. 프리아모스는 자처해 길 위에 섰다.
그가 탄 마차는 아킬레우스의 천막을 향해 우직하게 달렸다. 이리스가 어둠 속에서 가야 할 길을 밝혔다. 전령의 신 헤르메스가 곳곳 망을 보고 있는 그리스 연합군 파수병을 잠재웠다. 프리아모스는 순식간에 아킬레우스의 천막 입구까지 올 수 있었다.
아킬레우스도, 프리아모스도 한참을 울었다

아킬레우스는 이날도 잠들지 못한 채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는 파트로클로스가 숨진 후부터 한순간도 깊이 잠들지 못했다. 어쩌다 잠에 빠지면 틀림없이 파트로클로스가 아른거렸다. 그러면 눈물을 쏟고, 두 팔로 허공을 휘적이다 벌떡 깨곤 했다. 그때가 되면 또 한 번 전차에 올랐다. 진지 바닥을 헥토르로 몇 바퀴는 쓸어야 직성이 풀렸다. 그때도 그런 순간이었다. 또 한 번 전차를 향해 가기를 고민하던 중…. 낯선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멍한 상태에서 벗어나보니 웬 노인이 보였다.
노인은 아킬레우스에게 붙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몸을 들썩이며 울먹이고 있었다. 한동안 그러곤 얼굴을 살짝 들었다. 아킬레우스의 손을 끌어당기더니, 거기에 입을 맞췄다.

“혹시?”
아킬레우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노인에게선 어떤 살기도, 악의도 느낄 수 없었다. “내 아들이 얼마 전 조국을 위해 싸우다 당신에게 죽었소. 그가 바로…. 헥토르요.” 아킬레우스에게 엎드린 노인, 프리아모스가 흐느끼며 말했다. “나는 아들 몸값을 치르고, 녀석 시신을 데려가기 위해 이곳을 찾았소.”
아킬레우스는 한 나라의 왕이 이렇게 홀로 자기 막사를 찾은 데 대해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 나는 그의 자식을 죽이고 능욕한 살인귀가 아닌가. 내가 당장 저 굽은 등뼈를 비틀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건가. “그대 부친을 생각해 나를 불쌍하게 봐주시오. 나는 이 세상 사람 누구도 하기 힘든 일을 하고 있소. 그건…. 아들을 죽인 자의 손에 입을 맞추는 일이오.”

프리아모스는 그제야 아킬레우스의 눈을 봤다.
주름진 두 손으로 아킬레우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아킬레우스는 그의 아버지 펠레우스를 떠올렸다.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흰머리와 팔자주름, 근육이 빠진 채 굽어가는 등…. 그가 기억하는 펠레우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킬레우스의 눈에도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결코 마음을 풀고 싶지 않았지만, 이 노인 앞에서 응어리가 조금씩 풀어지는 일을 어찌하지 못했다.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는 그대로 한참을 울었다. 청년은 아버지 펠레우스와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떠올리고서. 노인은 아들 헥토르를 그리워하면서.
진노의 사슬을 끊다

“당신도 사람의 심장을 갖고 있을 텐데…. 어떻게 당신 아들을 죽인 사내를 겁도 없이 찾아올 수 있습니까. 일단 앉으시지요.”
“나는 내 아들 헥토르가 이곳에 버려져 있는 동안은 앉을 수 없소. 보물을 잔뜩 갖고 왔으니, 아들을 되찾아 돌아갈 수 있게끔 해주시오.”
아킬레우스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여전히 화가 났고, 변함없이 원한이 깊었지만… 그래. 이만하면 됐다. 때마침 어머니 테티스가 전한 제우스의 경고가 떠오르기도 했다. 아킬레우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헥토르를 돌려드리겠습니다.”

아킬레우스는 줄줄이 엮인 진노의 사슬을 비로소 끊었다.
우리는 왜 싸우는가.
언젠가부터는 싸움의 이유도 잊은 채 그저 서로를 제압하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나는 왜 아가멤논과 충돌했는가. 파트로클로스는 왜 나 대신 전장에 나섰는가. 헥토르는 왜 파트로클로스를 죽였고, 나는 왜 헥토르에게 피의 복수를 가했는가.
우리는 상대에 대한 원한을 품고 태어나지 않았다.
단지 함께 있는 곳이 전장이었기에, 다투거나 죽이지 않으면 지킬 수 없기에 힘겨루기를 한 것이었다. 그사이 진노는 진노를 낳고, 파멸은 파멸만을 세상에 내보였다. 내가 인간이듯, 저들 또한 각자의 절절한 사연을 품은 인간이었다. 내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저들의 모든 것을 빼앗는 건 당연한 일인가. 당연한 일이 될 리 없었다. 하지만 분노는, 싸움은, 전쟁은 이 당연한 의문을 깡그리 다 잊게 했다.

아킬레우스는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드디어 잘라낸 것이었다.
“파트로클로스여. 몸값을 받고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줬다고 나를 원망하지 말게.”
…친구야. 누군가는 멈춰야 한다는 걸 나는 이제야 깨달았네. 파트로클로스의 무덤 앞에 선 아킬레우스는, 이런 중얼거림을 함께 덧붙였을지도 모른다.
헥토르의 시신을 넘겨받은 프리아모스는 무사히 그리스 연합군 진영에서 벗어났다.
트로이군은 아흐레간 헥토르를 애도했다. 열흘째 되는 날 헥토르의 시신을 장작더미 맨 위에 올려 화장했다. 그다음 날, 헥토르를 위한 봉분을 세웠다. 그리스 연합군은 그 기간 싸움을 걸지 않았다. 이 또한 프리아모스와 아킬레우스 사이 약속이었다.

다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죽고 죽이는 싸움은 계속될 것이었다. 전쟁 규모는 외려 커지기만 하고, 희생자의 수 또한 되레 많아지기만 할 터였다.
현실은 낭만적이지 않았다. 동화적이지도 않았다. 인류도, 역사도 기억력은 늘 짧기만 했다. <일리아스>는 그렇기에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지금껏 생생하게 전해졌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이 이야기를 접한 누군가가 실수의 반복을 종식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참고자료>
일리아스, 호메로스, 숲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읽기, 강대진, 그린비
일리아스, 김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에필로그

◎아킬레우스는 복수의 굴레는 끊었지만, 전쟁터에서 살육은 이어간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 전쟁이 끝나기 전, 파리스가 쏜 독화살을 맞고 허무하게 죽는다.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에게 죽는다.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는 그런 네오프톨레모스의 첩이 된다.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전쟁 영웅이 돼 돌아왔지만… 딸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을 잊지 않은 아내의 주도하에 살해당하고 만다.
◎메넬라오스와 재결합한 헬레네는 그곳에서 비교적 무탈한(전승에 따라선 다르게 묘사되기도 하지만) 생을 살다 죽는다.
◎트로이는 열세 상황에서도 10년 넘게 버텼지만, 결국 그리스 연합군이 매복해 있던 ‘트로이의 목마’로 인해 불바다가 되고 만다.
◎이번 전쟁으로 인해 올림포스 신의 피를 이어받은, 이른바 ‘영웅의 종족’ 또한 거의 전멸하고 만다. 그렇기에 이 전쟁을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엔딩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끝.
기자의 말풍선
지난해 12월 초부터 연재를 시작했던 트로이 전쟁 7부작을 오늘로 마무리했어요. 기나긴 여정을 같이 걸어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새로운 이야기로 또 뵈어요.
yul@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