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통령은 새로 부임한 당신들의 보안관이요. 러시아나 중국이 당신들을 위협한다고 생각하시오? 아니오. 당신들이 더 문제요. 언론 자유는 후퇴했고, 이민정책도 실패했소. 극우정당도 정치에서 배제하려고 하지요. 민주주의의 후퇴라고 할 만하오. 당신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과연 미국이 지켜줄만 한 건지 의문이요”
최근 뮌헨안보컨퍼런스 참석차 유럽을 방문한 1984년생 JD밴스 미국 부통령의 말이다. 트럼프에 순응하지 않으면 경제·정치·군사적 불이익이 불가피하다는 엄포다. 유럽도 당장은 지지 않았다. 밴스 부통령의 발언 직후 연단에 오른 독일 국방장관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앞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미국의 관세 전쟁에 “단호히 대응하자”고 촉구했다. 동맹인 미국과 유럽의 지도자들 사이 오간 말들의 수위가 갈등 중인 미국과 중국 보다 더 세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는 4월부터 교역국에 상호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부가가치세(VAT)를 비관세 장벽으로 지목했다. 부가세는 미국이 설계한 관세전쟁에서 일종의 ‘비대칭전력’이다. 미국은 연방정부의 부가세가 없다. 간접세로 주정부의 판매세가 있지만 세율이 6% 안팎이다. EU는 부가세 세율이 22%로 주요국 가운데 가장 높다. 회원국 세수의 절반 가량을 차지할 정도다. 미국이 유럽산 수입품에 15%이상 관세를 부과할 근거가 될 만하다.
미국은 최근 우크라이나 종전을 위해 러시아와 양자회담을 갖기로 하면서 유럽을 완전 배제했다. 미국의 피트 힉세스(Pete Hegseth) 국방장관은 협상에 앞서 3가지 △전쟁 전 (우크라이나) 영토 보장은 환상이며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도 불가하며 △러시아로부터의 위협을 막기 위한 미국의 지원도 없을 것이란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우크라이나에서 각종 이권을 챙길 계획을 마련했다.
유럽의 정상들이 41세 미국 부통령 앞에서 모욕을 참아야 하는 굴욕적 상황은 어쩌다 벌어지게 된 것일까?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로 유럽에서는 ‘현자(賢者)’로 손꼽히는 마리오 드라기(Mario Draghi) 이탈리아 전 총리가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즈(FT)에 기고한 글에서 답을 찾을 만하다. 여러모로 유럽과 닮은 우리나라에도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다.
먼저 내부의 불합리한 규제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추정한 유럽의 내부 장벽은 제조업 기준 45%, 서비스업 기준 110% 관세와 맞먹는 규모다. 이러니 유럽 기업들은 역내 거래보다 미국 등 역외 거래를 선호하게 되고 결국 성장 정체로 이어졌다. 특히 디지털 분야와 같은 혁신 서비스 규제들은 기술기업의 성장과 생산성 개선을 막았다.
역내 거래가 위축되면서 대외개방은 확대됐다. 1999년 이후 2024년까지 유럽의 GDP 대비 무역 비중은 31%에서 55%로 크게 확대됐다. 같은 기간 중국은 34%에서 37%로, 미국은 23%에서 25%로 늘었다. 세계화의 결과일 수 있지만 유럽 기업이 위축된 내부 성장을 만회하기 위해 수출과 수입 등 무역에 의존한 결과이기도 하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유럽의 내수 위축이 심각하게 진행된다. 드라기는 여러 요인 가운데 특히 파격적인 기술과 관련된 연구개발(R&D)을 지원하는 재정의 역할에 주목했다. 2009년부터 2024년까지 미국 정부가 14조 유로를 투자할 때 유로존은 2.5조 유로를 투입하는 데 그쳤다. 더 높은 생산성을 이뤄내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 재정 투입은 기업의 투자의지를 높여 수출 의존도를 줄이고 튼튼한 내수기반을 갖추는 데 중요하다는 게 드라기의 결론이다.
드라기는 각 회원국이 자국의 이익과 유럽연합 전체의 이익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채 재정안정성에만 집착해 정부 지출을 통제하고, 새로운 기술의 위협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는데에만 중점을 둔 정책을 펴는 것은 과거 민족주의 국가에나 적합한 선택이라는 지적도 덧붙였다.
사실 미국 입장에서 유럽은 좀 얄미운 동맹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로부터 유럽을 구한 것은 미국이었다. 물론 그 대가로 미국은 세계 패권을 넘겨받았다. 이후 공산주의 소련의 위협에 맞서 유럽을 부흥(Marshall Plan)하도록 지원한 것도 미국이었다. 냉전 때 미국과 유럽의 동맹은 단단했지만 소련이 붕괴하고 중국이 개방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미국은 러시아와 군사적으로 계속 대립했지만 유럽은 방위에 거의 돈을 쓰지 않았다. NATO 재정도 대부분을 미국에 의존했다. 대신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확장했고 동유럽까지 품으며 새로운 시장을 얻었다. 미국과 경쟁하는 중국으로 수출을 늘리고 러시아산 에너지를 수입해 경제적 실리를 챙겼다.
미국에 의존하는 NATO를 앞세워 EU를 확장하자 러시아가 반발했다. 러시아 입장에서 발트 3국에 이어 우크라이나까지 EU와 나토에 가입하면 턱 밑에 칼을 괴고 있는 모양이 된다. 크림반도 병합에 이어 우크라이나 본토를 공격한 이유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바탕에는 유럽의 탐욕도 존재한다는 풀이도 가능하다. 미국 입장에서도 밑지는 장사다. 바이든 행정부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대신 유럽이 러시아산 대신 미국산 에너지를 수입하도록 만들었다. 트럼프는 한술 더 떠 종전 후 우크라이나의 이권을 푸틴과 나눠 가질 생각이다. 당연히 유럽은 이 판에 낄 수 없다.

사실 유럽은 이제 제 코가 석자이게 됐다. 우크라이나에서 소기의 성과를 얻은 푸틴이 미국과 유럽의 틈이 벌어진 틈을 타 다음에는 북쪽 발트 3국으로 눈을 돌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러시아와 칼린드란드를 연결하는 좁은 통로(Suwalki gap) 사이에 리투아니아는 위치해 있다. 리투아니아를 러시아가 확보하면 발트 3국에 대한 통제권은 물론 유럽연합(EU)과 사이에 완충지를 튼튼히 해 발틱해 진출 통로까지 강화하게 된다.
발트 3국도 NATO의 일원이지만 침공을 받았을 때 ‘자동개입 조약’을 실행할 회원국이 있을 지 미지수다. NATO 사무총장은 최근 독일 언론과 만나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 전쟁을 준비할 때”라고 말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미국이 발을 뺀 NATO는 종이호랑이다. 심지어 유럽 각국의 이해도 엇갈린다. 유럽은 결국 미국에 고분고분할 수 밖에 없다.
유럽에 대한 드라기의 지적은 대한민국에도 꽤 적용할 만하다. 규제가 많기로는 대한민국도 전세계 주요국 가운데 둘째 가라면 서러운 곳이다. IT 강국이라면서 인공지능(AI) 관련 혁신은 찾기 어렵다. ‘소규모 개방경제’라는 이유로 여전히 수출과 무역 흑자를 경제정책의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내수 부진이 심각하고 이 때문에 저효율·저출산·고령화가 심화되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정부는 재정 안정성만 최우선으로 내세운다.
안보 역시 마찬가지다. 자주국방을 자랑한다지만 북한이 비대칭전력인 핵무장을 하면서 주한 미군에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 현실이다. 김정은과 이미 만나봤던 트럼프가 푸틴과도 밀월하면 한반도 문제도 우리 손이 아닌 주변 강국들에 좌우될 수 있다. 트럼프가 재선 후 처음 한반도 문제를 언급한 것인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다. ‘남한 패싱’(South Korea passing)’이다.
탄핵 정국이 지속되며 대한민국 정치는 ‘민주주의 모범국’에서 ‘양극단 대결의 전형’으로 추락했다. 미국이 경제적 압박과 안보적 위협을 동시에 가할 때 유럽보다 더 대처하기 어려운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트럼프 탓이니 그의 임기 4년만 견뎌내면 될까? 대한민국이 처한 경제와 안보의 동시 위기는 상당기간 방치된 구조적 문제다. 최근 2030년에 미국이 몰락할 수 있다는 다란 아세모글루 교수의 글을 소개했다. 이대로라면 그 전에 우리나라가 먼저 몰락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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