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7> 붉은 길, 푸르른 마음 (55)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그냥… 상상일 뿐이에요.”

“아무리 상상이라도 그렇지, 너무 심하지 않아?”

“지금 회장님의 처지는 암담하잖아요. 어쩌면 그보다 더 지독한 상상에 빠져 들 수도 있을 걸요?”

“예끼, 이 사람아!”

유민 회장은 현성애로부터 선뜻 항공티켓을 받아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저 마음만 굴뚝같을 뿐이었다. 유민 회장의 그런 마음을 꿰뚫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 현성애는 대뜸 그의 옆으로 다가서서 팔짱을 끼더니 세로로 길게 접은 항공티켓 두 장을 와이셔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회장님, 더 이상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남아공으로 떠나세요. 제가 함께 동행 해 드릴게요.”

“뭐라고? 현 양도 남아공엘 가?”

“걱정 마세요. 요하네스버그까지 갔다가 바로 되돌아 올 거예요. 저는 그저 회장님 옆자리에 앉아서…”

현성애는 잠시 말끝을 흐렸다. 울컥 쏟아지기라도 하려는 눈물을 참는 모양이었다. 손수건을 꺼내어 눈 가장자리를 꼭꼭 눌러 닦은 그녀는 숨을 깊이 내쉰 뒤에 결심한 듯이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냥 회장님 옆자리에 앉아있으려는 것뿐이에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회장님을 만날 수도 없고 연락도 잘 안 되고…”

또, 또… 그녀는 말끝을 흐리고는 손수건을 꺼내어 눈 가장자리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눈물 없이는 마음 표현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항변이었다.

“울지 말아요. 어쨌든 좋아. 현 양이 표를 구해주었으니 함께 남아공까지 가는 것도 나쁘진 않지. 그런데 내 처지가 암담하다는 말은 누구에게 전해 들었어?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게야?”

유민 회장은 와이셔츠 주머니에 꽂혀있던 항공티켓을 꺼내어 시간표를 손목시계와 맞춰 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마음은 남아공의 강유리에게 향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질질 눈물이나 짜는 젊은 여자와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이런 상황이 거북하기만 했다. 현성애에게 연민을 버리지 못하다가는 또 다시 깊은 함정 속으로 빨려 들어갈 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헛소문이 아니란 걸 잘 아시잖아요?”

“그럼 뭐야? 내 처지가 어째서 암담하냐고?”

“그야… 사업마다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고, 관재수가 따르고, 많은 돈이 새나갈 지경에 이르렀으니 암담하지요.”

“걸림돌? 그건 그렇다 치고 관재수는 뭐야?”

“자칫하면 형무소에 갈 처지에 몰렸다면서요?”

“이 사람아, 그건 정부의 고위 관료들과 잘 해결되었어. 헛소문이 그렇게 나돌다니… 환장하겠군. 거금이 새 나간다는 건 또 뭐야?”

“사모님과 이혼하면 천문학적인 재산을 빼앗긴다는 걸 몰라서 물어요? 그러니 400미터 절벽이 그리울 수도 있겠지요.”

“그만! 그만 입 다물어요. 심장이 벌렁거려서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어.”

사실이었다. 400미터 절벽을 상상하기만 해도 그의 가슴은 벌떡거리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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