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들 492명 대상 설문조사 70% “공정하지 않다” 응답 비대한 갑, 제작과정 좌지우지 창작력 위해 힘의 균형 절실

“요새는 영화를 10회차 촬영할 때마다 현장가편집본을 투자배급사에 의무적으로 보내줘야 합니다. 영화의 최종편집권도 4~5년 전부터는 제작사에서 투자배급사로 넘어갔습니다. 제작사와 프로듀서의 입지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죠.”

최근 만난 한 유력 영화제작자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요새 투자배급사는 10회차 단위별로 제작진이 촬영해놓은 영상을 받아 제작이 잘 이뤄지고 있는지 ‘검토’하고 필요한 경우 작품의 내용 및 제작진행과 관련한 요구나 지시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심하면 감독이 교체되기도 하는데, 최근에만 이 극단적인 경우가 한국영화에서 두 번이나 일어났다. 한 유명 중견감독이 겉으로는 제작사와의 갈등 끝에 촬영이 이미 시작됐음에도 대작 프로젝트에서 하차했고, 또 다른 작품도 감독이 중도에 바뀌어 완성돼 개봉했다. 한국영화를 좌지우지하는 대형 투자배급사의 막강한 ‘권력’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권력만큼 ‘의무’도 커졌을까. 꼭 그렇지는 않다. 특히 기획개발비용이나 추가 제작비는 대형 투자배급사에 비해 자본동원력이 열악한 제작사가 떠안는 경우가 많다. 비용은 줄이고 수익은 키우며 ‘리스크’는 최소화하고 ‘보상’은 극대화하는 것이 시장의 논리이고 기업의 생리이지만, 이것이 전적으로 ‘갑-을’ 관계, 즉 힘의 서열에 의해 이뤄진다면 문제다. 힘의 불균형이 불공정 거래를 가져오고 대중예술산업 분야에선 창작력 저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최근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발표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영화인 스스로가 체감하는 국내 영화산업의 불공정 정도가 충격적일 정도로 심각하다. 영화인들은 설문조사에서 한국영화산업의 공정성 점수를 100점 만점에 30점대로 매겼다. 설문조사는 지난 2~3월 사이에 이뤄졌으며 응답자는 투자, 제작, 배급, 연출, 시나리오, 기술, 홍보마케팅, 극장 담당자 등 영화의 전 분야를 망라한 종사자 492명이었다.

이들은 특히 투자배급사와 제작사의 거래관계에 대해 70.7%가 ‘공정하지 않다’고 답했으며, 공정성 정도에 대해선 100점 만점에 25.5점을 줬다. 다수의 응답자들이 꼽은 제작사에 대한 투자배급사들의 불공정행위로는 ▷수익분배율(투자배급사 6: 제작사 4)을 지키지 않음 ▷자사 배급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 간의 차별대우 ▷기획개발비용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음 ▷제작사의 수익을 일부 가져감 등이다.

‘비대한 갑’과 ‘극빈한 을’로 이뤄지는 영화산업의 불공정 거래 결과는 뻔하다. 콘텐츠는 대형 투자배급사가 ‘평균적인 잣대에 의해 산출된 흥행공식’대로 만들어질 것이다. 영화의 수익 여부와 관계없이 매출에서는 투자배급사 몫부터 최우선 순위로 분배돼 결국 리스크만 떠안게 된 영세 제작사들은 가장 약자인 스태프들을 실업과 임금체불의 벼랑으로 밀어낼 것이다. 우수한 인력들이 영화계를 회피하게 될 것도 명약관화하다. 한마디로 관객들은 질 좋은 한국영화를 보게 될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진다는 말이다. 한국 영화의 ‘크리에이티브’를 위해 공정 거래, 힘의 균형이 필요한 이유다.

suk@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