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박동미 기자]“쪼매만 가면 됩니더. 요쪽이야 요쪽.”
벌써 다섯 번째 똑같은 대답이다. 경상도와 강원도 사투리가 반반씩 섞여 독특한 억양을 가진 김상구 문화ㆍ관광 해설사는 설산을 훨훨 난다. 예순이 넘었지만 30년 넘게 산을 탄 내공이다. 눈 덮인 산은 그렇지 않은 때보다 5배 이상 에너지가 소모된다. 선두에서 무릎까지 차오른 눈 속에 길을 내는 사람은 오죽할까. ‘헉헉’대며 얼마나 더 가야 하냐고 물어봤자, 엄살로 들릴 뿐이다.
함백산 등정은 오전 9시 30분에 시작됐다. 애초 예상 하산시간은 12시. 해발 1418m의 금대봉에 올랐다가 다시 돌아오는 코스로 길어야 2시간이면 가능했다. 하지만, 태백 토박이 해설사의 의욕이 앞섰는지, 함백산 눈 속에 빠진 일행은 오후 4시가 다 돼 엉금엉금 기어 내려왔다. “금대봉 상고대 사진만 찍고 내려오자”던 일이 백두대간 한귀퉁이를 훑는 ‘진짜’ 산행이 됐다.
▶두문동재(1268m)넘어 금대봉(1418m) 눈꽃 구경=“여기는 이상해요. 터널 전후로 날씨가 다르다니까요. 거 참, 신기해…”
등산 시작점인 두문동재(1268m)까지는 보통 차로 오른다. 동행한 태백시청 공무원은 두문동재 터널을 ‘마법의 터널’이라 했다. 터널입구까진 눈이 별로 없는데, 터널을 지나자 온통 새하얗다. 두문동재가 가까워지자 설산은 그 위용을 더 당당히 드러낸다. 스노우타이어를 장착했지만 어딘지 불안하던 차는 결국 멈췄다. 아이젠(등산화 바닥에 부착해 미끄러짐을 방지하는 등산용구)과 스패츠(등산화 속에 눈ㆍ모래 등이 들어가지 않도록 발목에 차는 각반)를 채울 겨를도 없이 눈길에 섰다.
눈속에 발이 푹푹 빠진다. 파우더 스노우에선 아이젠이 되레 짐이다. 스윽스윽 눈을 밀고 지나가는 해설사 뒤를 바짝 쫒아, 두문동재에서 금대봉(1418m)까지는 단숨에 올랐다. 나무마다 상고대가 활짝이다. 연신 셔터를 누른다. 추워도 올라온 보람이 있다. 정선이 위치한 서쪽서 불어오는 바람이 매섭다. 바람에 날리는 눈이 연신 왼쪽 뺨을 때린다. 얼얼하다.
▶겨울엔 눈꽃 축제, 여름엔 야생화 군락지 등정=함백산 상고대뿐만 아니라, 그림 같은 눈꽃으로 유명한 태백지역의 ‘눈축제’가 1월 27일부터 내달 5일까지 열린다. 올해로 19회째인 이 행사는 지난해 구제역으로 취소됐던 아쉬움을 달래려고 더 크고 화려해졌다. 낮엔 함백산 금대봉에 오르고, 밤엔 황지연못과 중앙로를 비롯한 태백 도심의 별빛페스티벌을 즐기면 환상궁합.
“초여름엔 이 능선을 따라서 동편으로 700여가지 야생화가 군락을 이룹니다. 신기한 건 정선쪽으론 잘 안 펴요. 능선을 기준으로 동ㆍ서 날씨 차가 큰가 봐요.”
그래서 함백산에 사람이 더 북적이는 때는 사실 꽃피는 5~6월. 두문동재에서 출발해, 능선을 따라 분주령(1080m), 대덕산(1307m)을 거쳐 검룡소(한강 발원지)로 이어지는 코스가 인기.
생수병 속에 얼음이 맺혔다. 주머니에 넣어둔 초콜릿 바는 너무 딱딱해서 씹는 데 턱이 다 뻐근하다. 흡연자들은 담배를 주섬주섬 찾다 이내 마음을 비운다. 이런 설산에서 산불이야 나겠냐만, 생태경관 보전지역이다.
“금샙니더. 코스가 원만해서 별로 힘들지 않아요.”
금대봉에서 되돌아온다던 애초 계획을 잊었다. 베테랑 산악인의 말에 판단이 흐려졌다. 어쩌면 하얀 눈밭에 마음이 홀렸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후진 아닌 전진.
▶험산준령 눈꽃 트레킹 vs. 태백산 종주 트레킹=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 더 위험한 데, 눈 쌓인 산은 더욱 그러하다. 눈이 어설프게 얼어붙은 곳에선 어김없이 넘어진다. 차라리 푹 빠지면 나을 텐데, 착 붙는 느낌이 들다가 쿵 하고 떨어진다. 서너 번 넘어지고 나면 지쳐서 눈밭에 드러눕는다. “멀었어요? 이 길 맞아요?” 여기저기 볼멘 소리가 터져나온다. 눈길도 힘든데, 쓰러진 나무가 길까지 막는다.
“보통 2월에 어마어마한 상고대가 만들어지면서, 그 무게에 나무들이 쓰러지죠. 그런데 이상기후로 올해는 그게 벌써 지난 11월에 왔어요.”
눈이 내리지 않아도 4시간30분 정도 소요되는 <두문동재~분주령~대덕산~검룡소> 트레킹 코스는 해발 1000m의 험산준령을 따라 이어진다. 산행이 처음이라면 모험은 않는 게 좋다. 특히, 눈 내린 겨울산은 아름다운 만큼 위험하다.
태백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보다 일반적인 태백산 종주 트레킹을 권한다. <유일사~천제단~당골> 코스 혹은 <당골광장~제당골~문수봉~천제단>으로 이어지는 역행코스도 새롭다. 반짝반짝 빛나는 상고대를 걸친 주목군락, 두툼한 눈모자를 쓴 천제단, 첩첩이 겹쳐지는 하얀 백두대간의 위용을 느낄 수 있다. 두문동재 코스와는 달리, 힘이 들면 어느 지점에서든 쉽게 내려올 수 있는 것도 장점.
▶분주령~대덕산~검룡소…마무리는 ‘다방 커피’=바람이 잦아든 나무숲 사이에서 잠시 숨을 돌린다. 저편 산에 시커먼 물체가 움직인다. 멧돼지 두 마리가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중.
“눈산에서 잘 다듬어진 길은 멧돼지가 낸 거예요. 괜히 따라가면 큰일나요.”
도란도란 오고가던 대화가 끊겼다. 해설사와 그 다음 사람의 거리가 크게 벌어진다. 그리고 또 그 뒷사람도 멀다. 묵묵히 발자욱만 따라가는 혼자만의 시간이다.
오후 3시 무렵, 드디어 분주령에 닿았다. 정선과 태백으로 가는 길이 나눠져, 옛부터 분주하게 사람들이 오갔다고 해서, 분주령이다. 검룡소를 발 아래 두고, 속력을 낸다. 다음 스케줄에 마음 바쁜 일행 중 한 명이 넘어지며 무릎을 다쳤다. 도착지점을 코앞에 둔 때였다. 압박붕대로 무릎을 칭칭 감고 엉거주춤 걷는다. 누군가 그 모습이 마치 ‘패잔병’ 같다고 하자, 한바탕 웃음꽃이 폈다.
끝날 듯 끝나지 않던 눈길 위에 황갈색 흙이 조금씩 보인다. 검룡소 주차장에 도착하자 해설사가 보이지 않는다. 어느 새 안내센터에 먼저 들어가 커피를 타 놓은 것. 함백산의 생생한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던 해설사는 그제서야 강행군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달달하다. 등산 후엔 역시 ‘다방 커피’다.
<박동미 기자@Michan0821> /pdm@herald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