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에는 ▷인물 ▷시대정신 ▷대결구도 ▷이슈를 둘러싼 전선 ▷적절한 때에 필요한 전략을 쓰는 흐름의 관리 등 5대 요인이 작용한다.
지도자가 될 만한 인물을 부각시켜나가는 과정, 나를 어떻게 세팅하고 누굴 상대로 싸울지를 정하는 대결구도의 구축에는 어느정도 시간이 필요한데 비해, 이슈파이팅으로 전선을 짜고 자기 정파에 유리하도록 흐름을 조율하는 일은 중단기적 전술에 해당한다.
통상 대권다툼은 1년전쯤 고개를 들고 내년 대선은 4월총선 결과에 따라 판짜기가 달라지기 때문에, 싸움판 멍석은 내년 봄에나 깔릴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우연일까, 필연일까. 차기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판은 생각지도 않게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통해 시작됐다. 너무 일찍 찾아온 것이다. 특정 정파가 시나리오를 짰던지, 오세훈 개인이 의도했던지, 8.24 투표는 누가 누구와 싸울지 기본구도를 세워버리고 말았다.
강남의 결집 등으로 현실화된 이른바 ‘보혁대결’ 구도이다. 빈부 갈등도 반영돼 있다. 좌클릭이 유행처럼 번지던 정치판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것이다. 이 대결구도는 구태적이지만, 정쟁의 에너지를 키울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모두가 중도로 쏠리면 피아 구분이 어려울텐데, 쪼개고 갈랐으니 적이 다소 명확해진 것이다.
쪼개기, 가르기, 이 분열상은 앞으로 동서 지역대결, 계층 갈등을 부채질할 가능성도 있다.
8.24 이후 권력을 노리는 자들의 셈법이 복잡해진다. 보수에 ‘나눔’을 덧씌워 중도로 외연을 넓히고자 했던 1위 주자 박근혜는 아성으로 여기던 ‘보수’라는 텃밭에서 이상징후를 발견한다. 왼쪽으로 조금 이동했다가 8.24 국면에서 원래 서있던 자리를 돌아보니 달갑지 않은 자들이 쟁기질을 하고 있다.
그동안 단일 대오를 형성하지 못하던 범친이계는 박근혜의 외연 확장과정에서 드러난 ‘정통보수’의 빈자리를 발견한다. 친이계는 어설프게 ‘분배’라는 남의 옷 얻어입기 보다는 본향에서 터 잡는게 더 손쉬울 것 같다는 판단을 하게된 것이다. 이렇듯 오세훈의 주민투표는 정통보수 맹주 전쟁을 초래했다.
무상급식으로 상징되는 복지논쟁에서 박근혜는 가부 판단을 하지 않은채 침묵했다. 그러는 사이 강남은 결집했다. 그 결집은 오세훈으로 상징되는 ‘비 박근혜’계의 움직임에 따른 실천행위였다. 친이계 등은 새 둥지를 얻었고, 박근혜는 옛 둥지 수성과 새 영토 개척이라는 두 개의 짐을 지게 된 것이다. 그 기간이 짧든 길든, 활로모색을 위한 친박계의 고민과 강남좌파 영남지역 개혁파의 위축은 불가피해 보인다.
야권도 보혁 이념대결이 도래했음을 인정한다. 손학규는 “그렇지 않아도 대한민국은 특권층과 서민, 수도권과 지방으로 나뉘어 갈등에 쌓여 있는데, 이념대결을 본격적으로 부추긴 것이 이번 주민투표”라고 말했다.
8.24 전투에서 외형상 승리를 거뒀지만 구도짜기의 주도권을 여권에 넘긴 것은 패배다. 따라서 피할수 없는 보혁대결의 전장에서 진보개혁의 색깔을 선명히 할지, 여당의 우클릭을 겨냥, 중도로 외연을 확대하기 위해 실용을 보강할지 두 개 고민을 동시에 하게된 것이다.
야권 통합 또는 연대의 필요성은 이전 보다 커질 수 밖에 없다. 하도 노선이 많기에 대통합은 어렵겠지만, 합리적 개혁세력과 선명한 진보그룹으로 나눈뒤 연대의 방법을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질 전망이다.
문제는 보혁대결이 동서 지역대결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영남 유권자는 호남의 2.5배이다. 충청, 제주, 강원이 전부 호남과 뜻을 같이 한다해도 영남권에 100만명 모자란다. 수도권에서 45대55로 지더라도 충청, 제주, 강원에서 30%만 얻으면, 이긴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이 ‘달콤한 유혹’을 여권 일각에서 외면할 리가 없다. 최근 여당내에선 ‘호남배제론’ 논쟁이 일기도 했다. 이는 민주당의 부담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8.24 투표는 여당내 특정계파에게는 ‘1타3피’인 것이다.
그러나, 너무 일찍 잡힌 ‘구도’가 어느순간 부질없어질 가능성도 있다. 5대 요인중 여의도 정치공학으로 극복할수 없는 것이 바로 민심으로 표현되는 시대정신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 ▷따뜻함의 진정성이 묻어나는 시장경제 ▷사회통합이 부각되는 이 시점에 보혁, 동서대결 구도를 조장하는 것은 돌이킬수 없는 역풍을 맞아 8.24 주도세력을 낙동강과 양재천에 고립시킬수도 있다.
또 임기말 MB와의 관계, 문재인의 돌풍, 서울시장 보궐선거 및 총선 결과 등 변수에 따라 너무 일찍 만들어 놓은 구도가 허물어질 가능성은 상존하는 것이다.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저격하지 않았다면 제1차 세계대전은 그때 그렇게 일어났을까. 어쩌면 경제-영토-패권주의 등 다양한 변수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2차대전 하나만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8.24가 빚은 구도는 내년 늦봄부터 벌어질 본게임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일수 있다. 8.24 프레임이 ‘구태’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한나라당 일각에서 8.24 결과를 승리라고 강변하는 것은 오만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때문다.
<함영훈 선임기자 @hamcho3> abc@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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