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날개에 숨긴 칼 (29)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평소 무소유의 가치를 설파하며 속세의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홀로 살아가던 법정 스님은 열반하신 후에도 당신께서 행여 남겼을지 모르는 삶의 흔적을 지워달라고 유언했다. 이를테면 살아생전 남긴 글조차도 장차 책으로 묶어내지 말라고 당부하셨지만… 어디 그런가? 여전히 속세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우리들은 스님의 책을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당당히 올려놓고야 말았다.
어쨌거나 법정스님의 강연을 듣거나 책을 읽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유호성과 김지선에게 무소유의 상황이 닥쳤으니 그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걸 어째요? 아무 것도 없어.”
“큰일 났는걸? 도둑이 들었나?”
뒤늦게 동쪽 해변 술통 앞에 도착한 유호성은 눈을 화등잔만이나 하게 뜨고는 술통을 까뒤집었고, 김지선은 혼비백산하여 술통 아래쪽 모래밭을 파헤쳤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곤 빈 술통과 물에 젖은 핸드백, 지갑 뿐이었으니 나오는 것이라곤 놀라움이 뒤섞인 한숨뿐이었다.
“도둑이 어떻게 들어 왔겠어? 여긴 무인도라고.”
“그럼 짐승이 다녀갔나요? 원숭이라든지…”
“여기가 아마존 밀림지대인 줄 알아? 원숭이가 나오게?”
“그러니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소리지요.”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누가 다녀갔으면 백사장에 발자국이라도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밀물이 들어왔다 나가서 발자국이 지워졌나 봐요. 이것 봐, 핸드백이 물에 푹 젖었어요. 돈도 물에 모두 쓸려 내려갔나 봐… 난 몰라.”
“그런 모양이네. 술통이 물 위에 떠다니면서 엎어지고, 잦혀지고 했나봐. 그래서 내용물이 물에 다 떠내려갔나?” 진정 큰일이었다. 이곳이 무인도라니 당장이야 옷을 벗고 있어도 무관하지만 막상 내일 부터 무슨 봉변을 당하게 될지 걱정이었다. 전화기도 없으니 연락할 재간도 없고…
“오빠, 어떡해요? 넋 놓고 기다릴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뾰족한 재간도 없어. 이거 낭패로군.”
노루를 잡아 가죽팬티를 만들어 입어? 아니면 넓은 호박잎을 엮어서 타잔 팬티라도 만들어볼까? 모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어느 얼빠진 놈이 무인도에 호박을 심을까? 자그마한 동산에 잡목은 우거졌으나 대부분이 가시가 삐죽삐죽 돋은 아카시아 나무였고, 노니는 짐승이라야 들쥐 한 마리도 발견할 수 없는 허접한 섬 아니던가.
“당장 배고프고 목말라 죽겠어요. 한 시간도 버티기 힘들 텐데 쫄딱 굶은 채로 오늘 밤을 어떻게 넘겨?”
“나무를 태워서 연기를 피워볼까? 아! 라이터나 성냥도 없군.”
“부싯돌로 불붙이는 법 몰라요?”
유호성과 김지선은 벌레 씹은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막상 묘안이 떠올라 119 등에 연락이 닿는다 해도 구급대원 앞에서 홀랑 벗은 알몸을 가릴 만한 방법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동영상으로 사진 찍혀서 9시 뉴스에 보도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거 사태가 심각하군’ 어쩌고 하면서 사색이 되어가는 유호성을 보며 김지선은 결국 눈물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몰라, 몰라! 술통을 부숴서 나무 옷이라도 만들어 내요.”
굶어 죽든, 목말라 죽든… 그녀에게는 알몸을 가릴 옷이 더 중요하기만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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