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적과의 동침 (33)

글 채희문/그림 유현숙

비록 페이퍼컴퍼니이긴 하지만 랠리 경기를 위해 SPC (특수목적 회사)를 설립한 유민 회장은 그 사업의 시작으로 현금 500억 원을 우선 납입하기로 되어있었다. 정계의 거물급 인사와 협상을 마친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난 상황이었다. 하지만 막상 현금을 내어놓아야 할 날이 닷새 앞으로 다가오자 그는 심히 속이 쓰려왔다.

“도대체 자동차 경주란 게 뭐야? 박 터지게 달려서 1등으로 꼴인하는 놈에게 트로피 하나 안겨주면 끝나는 거 아냐? 그런데 뭔 돈이 이렇게 깨져?”

소위 ‘런런런 SPC‘ 창업식을 거행하는 자리였다. 하긴 회사 이름도 대충 지었으니 창업식도 속도전으로 끝낼 요량이었다. 런이란 무엇이냐? R·U·N… 우리말로 번역해서 ’달려!‘ 아니겠는가.

유민 회장이 특수목적 회사의 명칭을 RUN으로 정하게 된 동기는 무척 단순했다. 마침 어제 밤에 가라오케에서 술을 거나하게 마셨는데, 그 자리에서 일본의 대중음악 가수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나가부치 쯔요시‘의 대표곡 RUN을 신나게 한 곡 뽑았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경기 운영에도 돈이 들어가지만 마케팅 관련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소요되는 사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회장님. 특히 국내시장은 물론 일본 시장, 중국 시장에도 마케팅이 우선되어야 할뿐더러 물 밑으로는 정치적인 협상도 이어져야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돈만 달라고 하지 말고 자네들이 몸으로 뛰어봐. 돈! 돈! 하고 쫓아다니면 하룻밤 새에 행복도 물 건너가는 거야. 알겠어?”

유민 회장은 창업식에 참석한 임원들에게 이렇게 호통을 치는 것으로 생돈이 깨지는 것에 대한 분풀이를 하고 있었다. 얼핏 들으면 멋있는 말 같았으나 사실은 RUN의 노랫말이었고 창업식 상황에도 맞지 않는 논리였다.

어찌 되었건 임원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회사 내에 스포츠마케팅 팀은 존재해 있었지만 아직도 그 팀을 끌고나갈 방향조차 설정되어 있지 않다는 부담을 그들이 떠안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질적인 팀의 수장인 신희영 여사 편에 서자니 골프에 관심은 있으나 예산이 바닥이고, 레이싱사업 쪽에 줄을 서자니 억지춘향으로 돈을 쏟아 붓는 사업이라 유민 회장의 신경질을 받아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세계에서 유명한 레이싱 경기를 꼽으라면 ‘르망 24시’와 ‘모나코 그랑프리’, 인디 500, 파리-다카르 랠리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인디 500같은 경우는 월드컵, 올림픽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는 대형 이벤트입니다. 물론 시리즈 전체로 본다면 F1의 관람객이 훨씬 많지만 단독 이벤트로만 따질 경우에 인디 500이 앞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모나코 그랑프리는…”

“시끄러워, 이 사람아. 레이싱 핑계로 해외 나가서 콧바람이나 쐬려고 파리네 모나코네 떠드는 거지? 왜? 내 말이 틀려?”

“아닙니다. 향후 우리 회사가 주축이 되어서 벌여야 할 레이싱 경기의 규모에 대해서 말씀드리려는 중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요점만 얘기 하라고.”

“계속하겠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레이싱 경기는 ‘F1’이나 ’WRC‘, ’나스카‘ 경기와는 달리 드라이버들이 평생을 바쳐서…”

“글쎄, 요점만 말하래도?”

“네! 중국 서안에서 출발, 신의주, 부산을 거쳐 히로시마까지 달리려면 국경을 세 차례나 통과해야 하고 북한과의 상업적 교류가 앞서야 하며 국제적 마케팅이 따라주어야 하기 때문에 3000억 원이 훨씬, 훠얼~씬 넘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요점입니다.”

“넌 그래서 더 이상 진급을 못해.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 많은 돈을 들인 연후에 얼마를 건져낼 수 있느냐’라고. 알겠어?”

“죄송합니다만 마케팅이 받쳐주지 못하면 1원도 건지지 못하고 거덜 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자칫 까불다간 ‘한 방에 훅 간다’는 말이었다. 명색이 창업식 자리인지라 덕담을 듣고자 했던 유민 회장의 낯빛은 순간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