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표절 공방에도 권력관계가 존재해요. 아무리 억울하다고 말해봤자 계란으로 바위 치기예요.”
익명을 요구한 드라마작가 A씨는 방송가 표절 논란에 이같은 답변을 내놨다.
잊을 만하면 등장해 방송가에 파문을 일으킨다. 시비가 워낙에 잦으니 인기드라마의 ‘통과의례’라고까지 말한다. “드라마가 워낙에 잘 되니 흠집내는 거죠.” 방송사의 입장이다.
표절 의혹을 주장하는 쪽은 흔히 캐릭터의 일치, 기본 아이디어(뼈대)의 동일함, 핵심 스토리라인의 유사성을 앞세운다. 반박하는 입장에선 “세부적인 내용만 보고 전체 스토리라인을 무시한 주장”이라는 입장을 편다.
잘 나가든 못 나가든 해마다 수편씩 방송사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를 두고 표절 논란이 인다. “자신의 창작물을 도둑 맞은”(드라마 작가 A씨) 억울한 작가들은 인터넷의 열린 공간에서 호소하기도 하고, 조용히 법적 대응을 준비하기도 한다. 올해만 해도 벌써 두 편의 드라마 ‘동네 변호사 조들호’(KBS2)와 ‘피리 부는 사나이’(tvN)에 표절 시비가 일었다.
표절 공방의 경우 저작권에 대한 법 기준이 모호해 시비를 가리기엔 어려움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드라마의 주요 모티프가 서사 구성에 미치는 역할은 표절 여부의 기준이 되지만 법적 잣대는 다르기 때문이다.
앞서 2013년 방영된 SBS ‘야왕’은 한국방송작가협회까지 나서 표절 시비를 가리려 했으나 만족할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한국방송작가협회는 지난 2013년 8월 이희명 작가의 ‘야왕’이 최란 작가의 작품을 표절했다고 판단, 저작권 침해를 이유로 협회에서 이 작가를 제명했다. 이 작가는 그러나 표절의혹에 전면 부인하며 제명 조치에도 반발, 작가협회를 상대로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2014년 9월 이 작가가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았다는 데에 의견을 모으며 제명처분이 무효라는 원고일부승소 판결을 냈다. 작가협회는 즉각 항소했으나, 2015년 12월 서울고등법원은 이 작가의 제명처분무효를 재차 확인했다.
‘선덕여왕’(MBC)은 표절 논란으로 오랜 법정공방을 벌였다. 5년의 시간을 들여 3심까지 갔으나 재판부의 판단은 저마다 달랐다.
20여 전에도 드라마 표절 공방은 있었다. 1993년엔 한 변호사(윤상일)는 자신의 이야기를 쓴 법정소설 ’하얀나라 까만나라‘의 에피소드와 주인공 캐릭터를 당시 방영 중이었던 KBS 2TV 주말드라마 ’연인‘이 표절했다고 주장해 법정공방을 벌였다. 드라마 작가(최연지)는 소설의 표절 논란에 정면대응, 두 사람은 결국 법정에서 만났다. 1995년 법원은 “최연지 작가가 소설의 일부 내용을 무단 인용했다”고 인정, 윤 변호사에게 1000만원을 지급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후 1996년 대법원은 최 작가가 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과거의 판결은 비교적 명확했던 편이다. 금액의 차이는 있었으나 ‘표절’에 무게를 둔 판단이었다. 하지만 콘텐츠 홍수 시대에 접어든 현재 창작물 저작권에 대한 판결은 더 모호해졌다. 동일한 아이디어는 단지 소재의 유사성으로 치부해야 하는지, 소재보다는 스토리 전개의 발전과정에 더 중점을 둬야하는 것인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분명하지 않은 탓이다.
특히 국내법에선 표현의 자유를 이유로 작품 속 사상이나 생각, 소재, 모티프 등 아이디어에 대한 보호망이 없다. 한 드라마 작가는 “스토리텔링의 창작물은 작가 고유의 아이디어에서 시작해 확장해나가는 것인데 아이디어의 유사성은 법망을 피해갈 수 있어 표절이 확실시됨에도 불구하고 악용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드라마 시장은 창작권 보호의 사각지대”라는 말까지 나온다. 당연히 억울한 입장이 등장한다.
한 드라마 작가는 “이름 없는 작가들은 약자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미 인기리에 방영 중이거나 방영된 작품에 표절 의혹을 제기하면 이를 악의적인 흠집내기로 치부하는 것이 일반적인 대응 방식이다”라며 “더 말이 나거나 시끄러워질 경우 방송사와 제작사의 권력을 이용해 의혹을 제기한 작가들의 활동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다. 편성이나 제작 등을 앞세워 작품활동을 막는 경우다. 이 때문에 속앓이만 하는 경우도 있다”고 호소했다. 또 다른 드라마 작가는 “표절 시비가 일어도 인기있는 작품, 인지도 있는 스타작가를 상대로 할 경우 의미 없는 투쟁이 되는경우가 많다”라며 “가이드라인도 없는 데다 법적 기준도 모호해 얼마든지 빠져나갈 구멍은 많은 셈이다. 아무리 시비가 일어도 종영 이후엔 논란도 잠잠해지는 데다 이같은 잡음이 상한가를 달리는 드라마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 당사자들만 지치는 싸움이기에 고소 취하로 마무리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결국 “베꼈는지 안 베꼈는지는 당사자 밖에 모른다. 창작자의 도덕성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일부에선 “각자의 양심이 가장 중요하다지만, 양심을 지켰다면 애초에 표절 공방이 일겠냐”는 반응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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