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내게 아련한 추억이다. 고등학교때 3년간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친구 하나가 바둑을 잘 뒀다. 부러웠다. 징그럽고 싫었던 ‘점호’를 면제받았기 때문이다. 사감선생님은 점호 시간을 전후해 녀석을 호출했고, 수담을 나눠주는 대신에 ‘점호 면제’라는 선물을 받곤 했다. 점호를 받지 않아도 되는 녀석에 질투가 나 어깨 너머로 바둑을 배웠다. 수확은 있었다. 나도 몇차례 점호를 받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본격적으로 바둑을 생각케 된 것은 명지대 글로벌바둑최고위(GBC) 과정을 다녔을때다. 명지대 바둑학과 창설을 주도한 정수현 교수(바둑프로 9단)와 인연히 닿았고, 우연히 그가 만든 GBC과정에 합류하면서 바둑을 다시 보게 됐다.

‘이세돌-알파고 세기의 대결’ 성사 소식을 접하곤 바둑기자가 아닌 기자가 취재에 뛰어든 것은 바둑에 대한 호기심때문이었다. 사전설명회에서 이세돌 9단은 5:0, 최소한 4:1 승리를 자신했다. 기자 역시 이를 믿어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뚜껑을 여니 그게 아니었다. 간신히 한판을 건지긴 했지만, 이세돌은 완패했다. 기자 역시 바둑계, 과학계 못잖게 개인적 충격을 받았다. 알파고가 그토록 위력적으로 진화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바둑이 어떤 것인가. 인간 삶을 대변하는 반상(盤上)은 크게는 자연의 이치, 우주의 진리를 담았기에 인간 고유영역이라고 3000년 동안 철석같이 믿어왔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 인간 상상력의 보고라는 바둑이 인공지능에 지배당하는 모습을 목격했을때, 머릿속은 금세 하얘졌다.

기자는 최근 ‘인공지능 시대의 바둑 미래’라는 한 세미나에 참석했다. 세미나는 명지대 자연캠퍼스에서 진행됐다. 바둑 프로기사를 필두로 바둑계 인사가 주관한 자리였다. 용인은 다소 멀었지만, 한걸음으로 달려갔다. 한나절을 경청했다. 바둑기자도 아닌데, 세미나에 시간을 투자한 것은 한가지 이유에서였다. ‘알파고 쇼크’ 이후 바둑계는 과연 바둑의 미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너무 궁금했다.

거기서 만난 조혜연 9단(더바둑 대표)은 이렇게 단언했다. “직업 관점에서 프로바둑기사라는 직업군은 쇠퇴할 것입니다. 프로기사 및 바둑 종사자는 바둑 외 먹거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바둑에 관한한 집념의 승부사로, 총기가 가득차 있으면서도 늘 공부를 하는 조 9단의 말은 가슴에 와 닿았다.

절망은 아니다. 세미나에선 그렇게 요약됐다. 조 9단은 “알파고 충격을 활용하는 게 새로운 미래다. 인공지능과 결부된 바둑인생에 프로기사의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소수 최고수 바둑기사만 살아남는 시대, 그 속에서 인공지능 개발에 파생된 일을 찾는 것이 바둑의 미래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게 무엇인지는 연구해야 할 일이다.

기자 역시 같은 생각이다. 알파고가 바둑 영역을 잠식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는 것, 그것은 우리 인간만이 가능한 일이다.

이세돌-알파고 대결을 통해 기자로서도 새로운 우리 미래를 고민하는 시간이 됐다. 그런 점에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알파고 미워, 동시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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