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창설된 검찰은 대한민국 오욕의 역사 속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권위주의 시절에는 독재정권의 전가보도(傳家寶刀) 가 되어 사회 저항의 목소리를 잠재우는 일에 앞장섰다. 역대 정권들 역시 정국 주도권을 잡기 위해 사정 칼날을 활용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검찰은 살아있는 권력에 정면으로 맞서며 ‘국민검사’ 칭호를 받기도 했다. 기획수사 한 번이 대기업 전반의 회계투명성을 제고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은 적도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검찰에게 부여한 권한과 책임은 막중하다고 할 수 있다.
1958년 검찰이 진행한 ‘조봉암 사건’은 좌우를 갈라 우파가 득세하는 기반이 되었다. 검찰은 조봉암 전 국회부의장과 당 간부들을 간첩죄ㆍ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 기소하고, 재판 중에 행정처분으로 진보당 등록을 취소했다. 대법원은 조 전 부의장 사형이 집행된 52년 뒤, 과도한 수사였음을 인정했다.
1961년 거창 민간인 학살 유족회 사건, 1964년 인민혁명당 사건,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을 통해 검찰은 공산주에 맞서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메시지를 던졌다. 하지만 과도한 기소로 이 중 상당수는 재심을 통해 무죄가 됐다.
1990년대는 기획수사가 사회, 경제 밑그림을 바꿔놓았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5.18 특별법을 기초로 ‘역사 바로세우기’에 나섰다. 전임 대통령인 노태우ㆍ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수사하고 이들을 구속하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 정부에서 두 전직 대통령은 결국 풀려났지만 권력형 비리에 대한 직접적인 제동을 건 케이스로 평가된다. 후진국의 대명사 쿠데타가 이땅에 발을 붙일수 없도록 만들었다.
1996년 종금사 기획수사는 외환위기를 초래한 종금사의 사금고화, 금융관치 등을 반성하는 계기가 됐고, 1999년 공적자금 수사는 국민 혈세인 정부 돈이 ‘눈 먼 돈’ 되지 않도록 철저히 따지는 세출구조로 탈바꿈시켰다.
2003년 정파를 초월한 대선자금 수사는 검찰의 위상을 격상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송광수 검찰총장과 안대희 전 대검 중수부장은 팬카페까지 따로 생기는 등 큰 인기를 누렸다. 대선자금 수사를 통해 정치자금법이 개정되고 대기업들마다 기업윤리실이 설치되는 계기로 이어지기도 했다.
2008년 이명박 정부 당시 ‘박연차 게이트’ 수사에서 검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의 원인을 제공하는 등 ‘정치보복 대리인’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지난 4월에도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극단적 선택 이후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의혹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됐지만 리스트 8인방 중 홍준표 경남지사, 이완구 전 국무총리 2명만 불구속 기소 방침이 정해지면서 ‘살아있는 권력’앞에 다시 약해졌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양대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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