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성훈 기자] 지난해 2월 하우스메이트에게 성폭행을 당한 뻔한 이후 A(32ㆍ여) 씨의 일상은 망가졌다. 수시로 그날의 공포스러운 기억들이 떠올라 A 씨를 불안에 빠뜨렸고, 악몽에 시달려 줄곧 뜬 눈으로 밤을 보내야 했다. A 씨는 다른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두려워졌다. 몸에 난 작은 생채기들은 이미 아물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는 더욱 깊게 곪아 있다.

극한의 위협이나 공포를 경험한 강력범죄 피해자들은 A 씨처럼 정신적 후유증을 안고 평생을 살아간다. 법원이 이러한 정신적 후유증을 정량화하기 위해 학계와 머리를 맞대고 연구에 나선다.

서울중앙지법은 연세대학교 법ㆍ심리과학 융합연구센터(센터장 박상기, 김민식)와 손잡고, 강력범죄 피해로 인한 정신적 후유적 후유증을 정량화하는 연구에 돌입한다고 20일 밝혔다.

현재 우리나라 법원은 강력범죄의 정신적 후유증을 상해로 인정해, 피해자가 호소하는 피해 내용, 현재 상태, 치료 경위 등을 종합해 판단하고 있지만, 어느 정도가 상해에 해당하는 후유증인지에 대한 객관적이 기준은 없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강력범죄 피해자가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는 경우 이를 판결에 어떻게 반영해야 할 지 모호하다는 지적이 계속돼 왔다.

강력범죄 피해자에게 물리적인 상해는 없이 정신적 상해만 있는 경우 법 적용 문제가 대표적이다. 정신적 후유증을 상해로 인정할 경우 폭행죄는 상해죄가, 강간죄는 강간치상죄가 된다. 이에 따라 부과되는 법정형 역시 크게 달라지고, 민사상 손해배상 소송이 제기되는 경우에도 손해배상의 범위에 적지 않은 차이를 가져온다.

최근 들어 강력범죄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상해로 보아 강간치상죄로 기소된 사람이 늘고 있고, 재판에서 정신적 후유증이 상해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중요 쟁점으로 다퉈지는 사례가 증가하는 것도 기준 마련의 필요성을 뒷받침한다.

미국에서는 현재 이 문제에 관한 논의가 본격화되어 학계를 중심으로 정신적 후유증을 정량화하는 방안에 관한 연구가 상당 정도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중앙지법과 연세대 법ㆍ심리과학 융합센터는 20일 오후 2시 연세대 미래융합원에서 ‘강간치상죄의 정신적 상해 정량화 문제’를 주제로 전문가 세미나를 여는 것을 시작으로 관련 연구를 시작한다. 연구결과는 오는 11월 계최예정인 대법원 형사법연구회에서 발표할 계획이다.

법원 관계자는 “성폭력 가해자의 재범위험성을 측정한 결과를 참고자료로 삼아 전자발찌를 채우는 것처럼, 이번 연구결과의 신뢰성을 인정할 수 있다면 재판을 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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