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예천] “주모, 여기 술 한 상이요”

주모는 손님이 많아서 신이 났고 손님은 외상 긋는 맛에 술이 더 당긴다. 손바닥만한 초가주막, 손님 끊길 날이 없다.

여기 저기서 술 달라는 외침에 주모 손놀림이 빨라졌다. 왁자지껄하던 주막, 어느 새 하나 둘씩 자리를 털고 일어날 즈음, 그러나 술값 내는 사람은 없다. “주모~” 하고 외치며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휙’ 그으면 그게 바로 ‘계산’이다. ‘술값 외상’이다. 술값은 툭하면 외상이다. 아니, 외상 술이 더 맛좋다.

그런데 외상도 하루 이틀 한 두 명이라야지, 주모는 글자라고는 한 자도 모른다. 외상장부에 기록할 수가 없다. 밀린 술값 어떻게 받아냈을까.

‘봄 돈 칠푼은 하늘이 안다’고 했듯이 옛날 시골서 농삿일 하던 사람들에게 돈이 어딨을까. 그래도 술은 마셔야 하지, 일하다 허기 지고 목 마를 땐 대포 한 잔이 최고였다. 결국 외상 술이다. 봄에 마신 술값은 가을 추수를 해야 갚을 수 있다.

몇 달을 외상하는데 글을 모르는 주모지만 자신만의 외상장부가 있어야 했다. 외상한 사람을 기억하며 벽에다 부지깽이로 금을 그어 표시해뒀다. 소위 ‘벽체외상장부’다. 외상이 얼마나 많았던지 온 벽에 줄이 빼곡하다. 세로로 짧은 줄은 한 대포 외상이고, 긴 줄은 한 되 외상이며 갚은 사람은 가로로 줄을 그어 ‘변제완료’임을 표시했다.

그럼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기억했을까. 이 주모는 사람 기억은 기가 막히게 잘 했다. 다만 글자만 몰랐을 뿐. 소설 처럼 들린다.

몇 백년 전 조선시대 속으로 들어간 듯한 주막 이야기다. 느닷없이 ‘주막’이야기라니. 하지만 불과 8년 전까지 생생하게 이어져 온 주막이다.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있는 이 삼강주막은 1900년 경에 지어졌다. 100여 년 전 지어진 주막이다. 그러나 최후까지 남아 마지막으로 영업을 한 주막으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삼강주막 주모는 6ㆍ25때 남편을 잃고 4남매 키우기 위해 이 일을 시작해 2005년 9월까지 60년간 이 자리를 지켜왔다. 그리고 일을 그만둔지 한달 후 10월 88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불과 8년 전만해도 조선시대 주막풍경이 이곳에서 펼쳐졌다고 하니 역사는 그리 멀리만 있는게 아니었다.

술이라면 한 방울도 입에 못 대는 필자가 주막을 찾았다. 술이 중요하랴. 여기서 즐기는 사람들 모습, 또 이 ‘주막풍경’이 좋아서다. 이 마을 이장님이시자 주막을 설명해주시는 정재윤(65) 선생님을 찾아 주막과 마을의 내력을 들어봤다.

삼강주막이 있는 삼강리는 강원도 황지 태백산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600리를 흘러 이 곳까지 왔고, 경북 봉화에서 흘러 영주를 거친 내성천이 또 이곳에서 합류한다. 내성천은 3km 상류에서 회룡포를 350도 회전하고 다시 반대로 180도를 돌아 여기에 도착한다.

그리고 문경 사불산에서 발원한 금천이 여기서 합류해 세 개의 강이 만난 마을 즉 ‘삼강(三江)마을’이 됐다. 이 강은 여기서부터 부산 다대포까지 다시 700리를 흘러 낙동강 1300리 물길을 이룬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의 지형을 보면 또 재밌다. 강 너머 북쪽의 산은 문경 주흘산(1106m) 줄기 끝이고 동쪽은 안동 학가산(870m)의 끝이며 남쪽은 멀리 대구 팔공산(1192m)의 끝이 여기까지 밀고 올라와 멈췄다. 산과 강의 조화가 아름다운 마을이다.

삼강(三江)이란 이름은 400년 전 입향시조가 지었다. 이 마을 입향시조는 임진왜란 때 옥에 갇힌 이순신 장군을 선조 임금에게 건의해 구한 약포 정탁 대감의 셋째아들 청풍자공 정윤목 선생이다. 문인으로 이름을 날린 청풍자공 선생은 400년 전 광해군 때 입향해 청주 정씨 집성촌이 됐다. 이 마을은 지금도 오로지 청주 정씨들만 산다. 정탁 대감은 이웃의 류성룡과 함께 퇴계 이황 선생의 제자다.

오늘날 삼강마을은 약 30호에 70명이 산다. 1960년대에는 100호가 넘기도 했다. 이 작은 집성촌에서 국회의원(정재원)과 방직계 1인자로 불린 재벌(정재호)도 배출했다.

이곳에는 주막과 사공들의 숙소 등 대여섯 채의 초가건물과 500년 넘은 회화나무 2그루가 있다. 오랜 역사를 갖고 있던 나루터는 현대화 물결에 쓸려가 흔적 조차 없어졌다.

주막은 아주 작다. 8평이다. 그런데 눈여겨 볼 게 참 많다. 이 손바닥만한 초가지만 이것 저것 알고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그 옛날 서민들의 ‘가장 작은 집’의 대명사가 초가삼간(草家三間)이다. 아무리 작게 지어도 기본은 초가삼간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 주막은 그에도 못미치는 초가두칸(草家二間)이다. 전면 두 칸, 측면 두 칸으로 두칸겹집에 방이 2개, 부엌과 마루, 다락까지 있을 건 다 있다. 오밀조밀 기막힌 구조다. 한옥에서는 기둥과 기둥 사이를 한 칸이라고 한다. 보통 기둥과 기둥 사이에 방이 하나 있으니 초가삼간이라고 하면 방 두개가 설계된다. 그런데 이 주막은 초가두칸에 방을 두 개나 냈다. 그리고 부엌은 뒤쪽으로 뺐다.

또다른 특징은 방 2개에 문은 무려 7개다. 문이 왜 이렇게 많을까. 작은 방이지만 항상 많은 손님들이 들락날락하는 곳이니 서로 엉키지 않고 출입할 수 있게 곳곳에 문을 달았다. 조그마한 부엌에도 문이 4개나 된다. 손님은 많고 주모는 혼자서 일한다. 이 방의 손님, 저 방의 손님, 마루의 손님, 마당의 손님이 “주모, 여기 술 한 병” 하고 외치는데 어떻게 다 왔다갔다 할 수 있을까.

이 주막이 한창 번창할 땐 막걸리를 하루 10말, 15말을 팔았다고 한다. 그러니 문이 하나였으면 주모는 쓰러졌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를 위해 사람이 앉는 곳을 향해 문을 다 냈다. 주모가 몸만 돌리면 주안상을 다 건넬 수 있게 했다. 손바닥 만한 집, 벽 반 문 반이다. 주모 한 사람을 위한 최적의 주막 설계도인 것이다. 작은 초가 주막 하나에서 건질 지혜가 정말 많다.

이 주막에서 빼먹지 말고 꼭 봐야 할 게 바로 황토벽에 금을 그은 외상장부다. 학술연구를 온 학자들도 무릎을 치며 감탄해 했다는 벽체외상장부다. 주모는 수많은 손님이 외상하고 갔지만 글은 몰라도 이 부지깽이 자국이 누구의 외상인지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기억하고 표시했다. 부엌 안 벽에도 빼곡히, 바깥 벽에도 빼곡히 그었다.

관광객이 와서 손으로 문질러 많이 망가지기도 했다. 이제는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는 몇몇 부분에 아크릴판을 붙여 보존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은 벽체외상장부다. 서민이 살아온 이 귀한 삶의 흔적 어찌 놓치랴.

또 지금은 흔적 조차 사라졌지만 삼강나루는 주막이 생기기 전부터 유명한 나루터였다.

내륙인 만큼 조선시대 소금이 귀하던 시절, 부산에서 소금배가 여기까지 올라와 농산물과 교환해 가던 집하장이자 선적장이었다. 또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보러 갈 때 넘어야 했던 고개, 추풍령과 조령(문경새재), 죽령 중 가장 선호한 문경새재로 가는 길목이었기에 이 나루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옛날 선비들 사이에서는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 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넘어 가면 죽쑨다는 우스갯 소리가 있을 정도였으니 문경새재가 장원급제의 길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선비들이 이곳에서 나룻배를 탔다.

나루터의 마지막 사공 유영하 선생님은 지난 1980년 중반까지 일했다. 그 이후로 마을 젊은 주민들이 교대로 노를 잡다가 2003년 지금의 교량이 생기면서 나루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때의 나룻배 역시 모래사장에 방치해뒀다 썩어 없어졌다. 지금은 다들 아쉬워하고 있다.

이 마을의 아픔은 1934년 갑술년 대홍수 때 찾아왔다. 마을 절반 이상이 침수됐다. 지금은 둑길이 있지만 당시엔 마을과 바로 강이었다. 그때 보부상 숙소와 사공숙소가 유실됐다가 2008년 고증을 통해 복원됐다. 주막 주변의 집들도 지금은 도로 너머 편으로 옮겨갔다.

지금 이 마을 중앙에 59번 국도와 다리가 가로지르고 있다. 마을이 두 토막 났다. 주민들은 우회 건설을 주장하며 강하게 반대했지만 민(民)이 관(官)을 이기지 못했다. 지금 멋진 관광명소가 되고나서 모두가 이 흉물스런 다리를 보고 혀를 차지만 이미 돌이킬 수도 없는 상황이 됐다. 주민의견과 탁상행정 간의 간극이 이런 흉물스런 결과를 가져왔다. 저 다리가 없고 그 자리에 나룻배가 떠다니면 관광주막, 관광나루터로 만점일테다. 우리의 옛 풍경을 고이 간직하고 후손들에게 전해줄 소재를 너무 쉽게 없애버렸다.

주막 뒤에는 500년 된 회화나무가 있다. 유난히 크고 굵은 가지 6개가 사방으로 뻗어있어 수 십 명이 앉아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주민들은 지금도 매년 정월 보름에 제일 나이 많은 회화나무에서 동신제(洞神祭)를 지낸다.

회화나무에는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아녀자들이 아침 일찍 물동이에 강물을 담아 이고 왔는데 이 때 회화나무 잎의 아침이슬이 물동이에 떨어진 물을 마시면 자손이 벼슬한다고 했다. 그래서 선비들은 이 나무를 아주 아꼈고 학자수(學者樹)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이 회화나무에 또 하나의 전설이 있다. 이웃 상주에 사는 목수가 이 나무로 배를 만들면 잘 뜨고 돈도 많이 번다 하여 톱을 들고 베러 왔다가 나뭇그늘에서 잠시 잠이 들었는데 꿈에 나무 수호신이 나타나 ‘이 나무를 베면 네놈은 명에 못 죽는다’고 고함치자 혼비백산해 달아났다고 한다. 신성한 나무에는 늘 해코지하는 사람을 혼내주는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마을을 지켜주는 회화나무. 500살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을 지켜주는 회화나무. 500살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리 너머 한 그루가 더 있는데 크기는 작아도 나이는 더 많다고 한다. 회화나무 고목 두 그루가 결국 나루터와 연결하는 마을 입구였던 것이다. 그 사이를 교량이 갈라놓아 살풍경이 됐다.

주막 뒤 회화나무 아래에는 크고 둥근 돌 하나가 있다. ‘들돌’이다. 옛날 농경사회에서는 어린 머슴이 장성하면 한 해 품삯을 올려받기를 원한다. 나도 컸으니 품삯을 더 많이 받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진 자’ 주인은 어림없다. 그래서 무작정 못 올려준다고 할 수는 없으니 돈 올려받을 만큼 농삿일에 힘을 쓸 수 있느냐를 테스트한 후 합격하면 올려주겠다고 한다. 그게 바로 저 ‘들돌’을 들어보게 하는 것. 들면 올려주고 못들면 안올려준다. 그런데 저 돌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든다. 무게가 120kg에 달걀 처럼 둥글게 생긴 저 돌, 미끄러워서도 못 든다. 힘쓰다간 허리 다친다. 주인 나리의 횡포다.

삼강주막 관광객은 평일 300~400명, 주말엔 1500명 정도 몰린다. 이곳에서는 막걸리와 파전, 도토리묵, 국밥, 국수 등을 판다. 사공숙소와 보부상숙소 건물은 방에 들어가 술 한 잔 즐길 수 있다. 이것 말고도 관광객들이 식사와 술을 마실 수 있는 집들이 두 채 더 있다.

일요일에는 각종 공연도 있어 흥에 겨운 주막풍경을 즐길 수 있다. 양반 과거길 등 체험과 한옥 및 황토찜질방에서 민박도 가능하다.

삼강주막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34호로 관리되고 있다.

글ㆍ사진=남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