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종사
시대가 달라지고 권력의 주인도 바뀐다. 왕조가 명을 다하고 공화정이 득세하는가 하면, 외세가 본래의 주인과 땅을 다투다가 물러나기도 한다. 목전의 권세에 빌붙는 자도 있고, 과거의 영광 속으로 사라지는 이가 있는가 하면, 질긴 삶을 부여잡고 모진 목숨 버티는 사람도 있다. 만나 뜨겁게 태웠던 불꽃 같은 사랑도, 그리는 것만으로도 충만했던 사모의 정도 다 지나가는 시간 속에 있었으니 그 모든 세계가 몸의 언어가 숲을 이룬 ‘무림’ 속에 존재했다. 중국의 거장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의 새로운 무협영화 ‘일대종사(一代宗師·사진)’가 담아내는 영상의 미학이자 철학이다. 왕 감독은 ‘일대종사’의 연출의 변에서 이렇게 말한다.
“쿵후는 수평과 수직, 치욕과 영예의 중도이고 시대는 번영과 쇠락, 분단과 통일의 반복이며, 그랜드마스터의 길은 존재함, 깨달음, 행동함이다.”
‘일대종사’의 뜻이자 영화의 영화 제목이 ‘그랜드 마스터(Grand Master)’, 즉 ‘대가’다. 영화는 전설적인 무협액션배우 리샤오룽(이소룡ㆍ李小龍)의 스승이자 쿵후의 한 문파(갈래)인 영춘권의 대가 ‘엽문(葉問)’의 삶과 그가 인생 역정에서 마주쳤던 인물, 그리고 중국사의 격랑이었던 20세기 초ㆍ중반의 시대적 풍경을 그려낸 작품이다.
엽문(량차오웨이 분)은 중국 남부 무술의 중심지인 광둥성 불산의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영춘권의 적통을 잇는 무인이다. 부인 ‘장영성’(송혜교 분)과 극진한 부부애를 나누며 살던 그는 팔괘장이라는 또 다른 문파의 대가 궁보삼의 은퇴를 축하하는 연회에서 그의 딸 ‘궁이’(장쯔이 분)를 만나 운명의 한 합을 겨루게 된다. 서로의 몸과 영혼을 탐닉하듯 승부를 겨뤘던 엽문과 궁이는 세속의 욕망을 넘어선 서로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을 갖게 되고 서신으로 마음을 주고받지만, 일본의 침략과 함께 두 사람의 운명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일본은 엽문을 회유하려 하지만 “나라가 재난에 빠졌는데 나만 부유한들 무슨 소용이냐”며 거부한다. 결국 엽문은 집을 빼앗기고 자식마저 잃은 후 불산을 떠나 홀로 홍콩으로 건너간다. 한편 궁이는 제자의 배신으로 인한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본다. 무림을 제패하겠다는 야심에 눈이 어두워 일본과 손을 잡은 팔괘장의 수제자 ‘마삼’(장즈린 분)에게 아버지를 잃은 것이다. 궁이는 복수의 한을 가슴에 품는다. 시대의 혼란과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지럽던 시절 궁이는 열차 안에서 우연히 ‘일선천’(장첸 분)이라는 남자를 위기에서 구해준다. 일선천은 팔극권의 명인이자 조국의 반역자를 처단하던 중국 국민정부의 비밀경찰로, 큰 부상을 입고 일본 경찰에 쫓기던 중이었다.
량차오웨이와 장쯔이의 대결을 비롯해 각 인물끼리 들고 날며 겨루는 액션은 화려하고 탐미적이다. “쿵후는 수평과 수직, 둘뿐인 세계. 지면 수평으로 쓰러지고 최후의 서 있는 자만 말할 수 있다”, “잎사귀 아래 꽃을 숨기니 방어할 수 없다”는 등 시적인 언어로 인생과 무술의 철학을 담아내는 수사도 돋보인다.
극 중 역사 앞에 갈린 세 인물의 운명은 결국 홍콩에서 만난다. 강직하고 낙천적인 엽문은 무일푼의 인생과 무림의 밑바닥에서 한 변두리 도장의 사범으로 새 출발해 전설적인 지도자가 되고, 복수의 갈망과 아버지의 그늘 속에 묻혀 있던 궁이는 자신만의 결단으로 인생을 무림으로부터 거둬들인다. 일선천은 홍콩 이주 후 ‘백장미 이발소’를 열어 새롭게 살아간다. 꼭 20년 전 무협영화 ‘동사서독’을 통해 반환 전의 홍콩인들이 가진 불안과 뿌리 없는 삶에 대한 실존적 감성을 보여줬던 왕자웨이가 이번엔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완성되는 무대로 홍콩을 선택한 것이다. 전작에서 볼 수 없었던 낙관과 의지는 ‘통일’을 이룬 중국 영화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 아닐까. 오는 22일 개봉.
이형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