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식)을 할 때가 가장 즐겁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일을 두 배로 한다.
죽는 순간까지도 주식을 하고 싶고, 다시 태어나도 펀드매니저가 되겠다는 가치투자의 전도사.
수익률 톱을 다투는 업계 1등 펀드매니저로서 오늘도 밤 9시까지 사무실에서 불을 밝힌다. 허투루 보내는 시간은 없다. 싼 주식을 찾아내는 작업이 즐겁고 단 한 명의 고객이라도 손실이 나면 밤에 잠을 청하지 못한다. 스스로를 “주식에 미쳤다”고 말하는 바로 이채원(49)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부사장이다.
일에 몰입하는 만큼이나 가정에도 충실하다. 골프를 배우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주말만큼은 온전히 가족과 보내기 위해서다.
주식 말고는 별다른 취미란 게 없다는 이 부사장의 일주일은 주식에 빠진 닷새와 가족과 함께하는 이틀로 채워진다.
주식과 가족에게서 행복을 찾는다는 그를 서울 여의도 한국금융지주 본사에서 만나 주식을 향한 열정과 가족에 대한 사랑 보따리를 같이 풀어봤다.
▶‘주식에 미친 놈’으로 시작하다=업계 제일의 펀드매니저지만 본래 꿈은 펀드매니저가 아니었다. 주식시장에 뛰어들 것이란 생각도 없었다. 경영학을 전공한 연으로 졸업을 앞두고 금융권 아니면 무역업에 원서를 냈고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에 입사하게 됐다.
그렇게 별 생각 없이 들어온 증권업에 이채원 부사장은 속된 말로 미쳐버렸다.
“처음 접한 주식이 너무 재미있어 하루 종일 몰입했습니다. 1988년 12월에 입사했는데 상장회사의 투자편람이 나오면 하도 읽어서 달달 외울 정도였죠.”
그 당시 이 부사장의 별명은 ‘주식에 미친 놈’이었다. 지점 영업을 하던 그는 기업 가치 대비 싼 주식을 고객에게 권해도 인지도 등의 이유로 매수로 잘 이어지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펀드매니저를 꿈꾸게 됐다.
이 부사장은 “펀드매니저는 책임만큼이나 권한도 크고 독립적”이라며 “펀드 운용에 있어서는 사실상 ‘사장’과 다름없어, 마음껏 좋은 기업에 투자할 수 있어 행복했다”고 전했다.
한국금융지주에서 26년째 일하는 것은 펀드매니저의 꿈을 이룰 발판을 회사가 마련해줬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이를 ‘은혜’라고 표현했다. 이직이 잦은 금융투자업계에서 고액 연봉으로 유혹도 많았지만 “회사를 옮길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장기 펀드를 운용하는 매니저가 떠나는 것 자체가 고객에 대한 배반이라 생각했다.
▶나는 워런 버핏이 아닌 가치투자자일 뿐이다=이 부사장의 사무실에 들어서면 태권브이 목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미술을 공부하는 고등학생 둘째 딸(지운)이 올해 초 만들어준 작품이다.
태권브이 가슴팍의 ‘브이’는 증시의 반등을 의미하듯 오른쪽 꼬리를 길게 올려 화살표를 만들었다.
그는 “태권브이의 브이는 ‘밸류’의 브이”라며 “가치투자는 태권브이처럼 승리할 것”이라고 싱긋 웃었다. 태권브이가 ‘가치지킴이’인 셈이다. 코스닥 상장 엔터테인먼트업체인 와이지 사무실의 상징인 태권브이를 부러워했더니 딸이 가치를 담아 만들어줬다며 흐뭇해했다.
1998년 12월 ‘동원 밸류 이채원 1호’ 펀드를 내걸면서 국내에 ‘가치 펀드’를 처음 선보인 이 부사장은 그 때문인지 한국의 ‘워런 버핏’으로 불렸다.
업황에 흔들리지 않도록 대체재가 없는 상품을 생산하는 기업에 투자하는 워런 버핏의 ‘프랜차이즈 밸류’가 가치투자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벤츠는 타 자동차 회사가 기술력을 따라잡을 수 있지만 에르메스와 샤넬, 루이비통은 흉내 낼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어 시장 지배력과 진입장벽이 더 높다는 것이다.
이 부사장은 이 같은 이유로 에스엠엔터테인먼트 주식을 4000원에 사서 2만~3만원대에 털어낸 적이 있다. 소녀시대는 이 시대에 에스엠에만 있다는 것이 그의 가치 투자 이유였다.
그는 “버핏은 펀드매니저가 아닌 기업가이고 실제 본인이 투자한 기업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면서 “프랜차이즈 밸류는 동의하지만 우리는 성장성이 높아도 비싸면 절대로 사지 않는다”고 말했다.
▶7만 고객 중 단 1명이라도 ‘마이너스’면 잠이 안 온다=실명펀드인 ‘동원밸류 이채원 1호’는 외환위기를 겪은 후 1998년 고객들의 투자원금 손실에 대한 반성에서 나왔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코스피지수는 800선에서 300선까지 고꾸라졌다. 60% 손실이 난 셈이다. 당시 이 부사장의 펀드 수익률은 -40%. 코스피 대비로는 17% 초과 달성이지만 고객 원금은 깨졌다.
그는 “워런 버핏의 스승이자 가치투자 이론의 창시자인 벤저민 그레이엄의 투자원칙은 딱 두 가지다. ‘돈을 잃지 말 것’, ‘이 원칙을 반드시 지킬 것’”이라며 “고객 원금이 손실나면 제대로 된 투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에 1998년 말 국내 가치투자 1호 펀드인 ‘동원밸류 이채원 1호’를 내놨고, 이듬해 닷컴버블 전까지 9개월 수익률이 127%에 달했다. 하지만 이 펀드는 닷컴 버블이 1999년 4분기에 절정을 이루면서 가치주 급락으로 수익률이 하락했다.
당시 새롬기술 등 인터넷주가 연일 상한가를 치는 사이 이채원 1호가 들고 있던 롯데칠성, 농심, 유한양행 등 가치주는 급락, 펀드 누적수익률이 88%로 떨어지고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그는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휴가와 연월차를 포함해 23일간 휴가를 떠났다.
김남구 한국금융지주 부회장이 그에게 “고객 돈을 투자 철학대로 운용하기가 쉽지 않으니 회사 돈으로 가치투자에 마음껏 나서보라”고 제의해 2000년 동원증권의 고유계정으로 운영에 나섰다. 회사는 그에게 700억원을 맡겼고, 나중엔 1500억원으로 신탁금액이 늘었다. 6년간 이 계정의 운용수익은 무려 435%. 이 기간 코스피 상승률이 56%임을 감안하면 8배 가까운 수익을 낸 셈이다.
이로써 그는 가치투자가 가능함을 증명해냈다. 함께 회사 돈을 운용하던 직원들을 데리고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을 만들었다. 그리고 10년간 믿고 투자할 사람만 받는 초장기 가치투자 고객을 모아 2006년 4월 최소 3년간 환매에 제약을 두는 10년투자펀드를 선보였다.
만 7년이 된 현재 이 펀드의 누적수익률은 130%다.
“고객이 최고점에 들어와 최저점에 환매함으로써 발생하는 손실까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리스크를 줄일 10년 투자 펀드를 선보인 겁니다.”
그는 “2007년 코스피 고점이 2085포인트인데 아직도 우리 시장은 1900포인트로, 이 기준대로라면 모든 고객이 원금 손실이 난 셈”이라며 “지난해 9월 처음으로 2007년 고점에 들어온 고객을 포함한 가입고객 모두 플러스 수익이 났다”고 전했다.
이 부사장은 단 한 명의 고객도 마이너스 수익이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투자밸류의 운용 규모는 4조4000억원, 고객 수는 7만명에 달한다. 밸류가 운용하는 펀드의 벤치마크는 코스피가 아닌 ‘금리+α’다. 적어도 모든 고객이 3~4% 수익이 확보돼야 이 부사장이 잠을 잘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심하고 겁이 많다. 그래서‘믿음’있는 옛것이 좋다”=고객의 소중한 자산을 운용하는 만큼 스트레스도 크다. 게다가 운동에는 취미가 없고 술도 즐기지 않는다. 종교활동도 하지 않는다.
“제 나름의 바이블을 읽어요. 벤저민 그레이엄의 ‘현명한 투자자’. 그러면 닷컴버블이나 2011년 이른바 차ㆍ화ㆍ정(자동차 화학 정유) 열풍 등 이해할 수 없었던 시장 움직임에 대해서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그래도 안 되면 비장의 카드가 있다. 바로 무협지다. 1990년대 용대운 씨의 ‘군림천하’시리즈는 벌써 열 번가량 봤다고 한다.
그는 옛것이 좋다. “재미없는 새로운 무협지를 읽느니 열 번 봐도 재밌는 책을 읽고, 영화도 새롭고 재미없는 것보다 재미있는 옛 영화를 봅니다.”
스스로 ‘소심하고 겁이 많아 안전한 가치투자가 맞는다’고 표현한 이채원식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그래서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 주가가 더 오를 것이란 걸 알면서도 처분한다고 했다. 초과 수익은 우리 몫이 아니며 남들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남보다 잘하는 것은 바로 욕심을 덜 내는 것이라고 했다. 가치투자란 말도 어찌 보면 대박은 어렵지만 그렇다고 깨지기는 싫은 소심함과 면피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는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기도 했다. 수익률 1등일 때가 아닌 갖고 있는 주식 포트폴리오가 건강한(저평가) 상태일 때가 행복하다고 했다.
그의 성향을 그대로 닮아서인지, 2006년 밸류자산운용 출범 당시 함께한 6명의 수제자 펀드매니저 가운데 절반이 남아있다. 배준범 부장과 김동영 부장, 강원석 차장이다. 배 부장이 운용과 리서치를 총괄하고, 김 부장이 공모 펀드를 담당하고 있다.
수제자 3명을 비롯해 밸류의 펀드매니저는 15명. 이들 모두 뼛속까지 가치투자 매니저들이다. 운용하는 모든 펀드는 이 부사장이 책임투자를 맡지만 매니저들이 사고파는 걸 관여하진 않는다. 토론해서 결과가 나오면 믿고 따른다. 매일 밤 9시까지 주식에 미쳐 근무하는 자신처럼, 매니저들도 자기 일을 매우 열심히 한다고 말했다.
이 부사장은 “보통 일년에 기업탐방을 1400회, 최고경영자(CEO) 탐방을 50회 정도 다닌다”면서 “현대차에 투자하기 위해선 경쟁사인 도요타나 폴크스바겐을 봐야 하기 때문에 해외 탐방도 이들 중 한 명 정도는 늘 나가 있다”고 설명했다. 최고경영자를 직접 만나는 것은 경영철학과 투명성, 도덕성을 보기 위해서다.
밸류의 초기 수제자 6명 가운데는 KB자산운용의 히트 상품인 ‘KB밸류포커스’와 ‘KB중소형주포커스’를 운용하는 최웅필 KB자산운용 이사도 있다.
“최 이사가 나가서 잘 안 됐으면 정말 속상했을 겁니다. 가치투자를 하는 회사가 다 잘되고 이 파이가 커져야 합니다. 주식이 과하게 떨어질 때 안전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는 “가치투자에 있어선 한국밸류가 선도 기업이지만 다양성과 규모 면에선 경쟁사 대비 열위에 있다고 본다”면서 “배당이나 중소형주, 나아가 장기적으로 아시아 신흥국 가치주에 투자하는 가치투자 백화점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나는 딸 바보 아닌 딸 병신이다”=가족 얘기가 나오자 행복한 소년같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가족을 위해 골프도 배우지 않은 그는 주말이면 무조건 가족과 보낸다. 특히 두 딸에 대한 애정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스스로를 ‘딸 바보를 넘어 딸 병신 수준’ 이라 일컫는 그에게 딸들은 가장 큰 응원군이기도 하다.
특히 대학생이 된 큰 딸(현영)은 닷컴버블로 이채원 1호가 고전할 때 큰 힘이 됐다.
어느 날 큰딸 책상에서 밤늦게 일하다 서류 정리도 못하고 출근한 후 얼마뒤 큰딸에게서 쪽지가 왔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고, 기다리면 주가는 언젠가 올라간다’라고.
큰딸은 논리적이고 분석적이어서 애널리스트를 했으면 한다는 생각도 슬쩍 내비쳤다.
두 딸뿐 아니라 그에겐 아내(정은미ㆍ45)도 든든한 지원군이다. 혈액형이 AB형으로 같은 두 사람은 첫 소개팅에서 한눈에 반해 만난 지 6개월 만에 결혼했다. 21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번도 다툰 적이 없다.
“아무리 바빠도 아내와 대화를 많이 합니다. 무엇보다 너무 훌륭한 엄마입니다. 저한테는 지금의 회사를 평생 다니라고 말합니다.” 아내는 그가 한국금융지주에서 내내 주식에 미쳐 보낼 수 있는 지원군 역할을 한 셈이다.
앞으로 계획도 지금과 다를 바 없다고 했다. “나이 80이 돼도 주식을 하고 싶어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밸류 펀드의 운용을 맡아서 말입니다. 주식이 아직도 너무 재밌습니다.”
가치투자 펀드 1호 매니저인 그가 국내 최장기 투자 펀드매니저의 타이틀을 거머쥘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인터뷰=김형곤 증권부장/kimhg@heraldcorp.com
정리=성연진 기자/yjsung@heraldcorp.com
사진=안 훈 기자/rosedale@heraldcorp.com
■“지금은 수익가치株 눈여겨 볼 때” [헤럴드경제=성연진 기자]‘원래 가치가 있는 것을 싸게 사둔 것이므로 두려울 것은 없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이채원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부사장의 방에는 이런 문구를 담은 작은 액자가 있다. 일본의 워런 버핏이라 불리는 사와카미 아쓰토 회장이 한 말이다. 이 액자에는 사와카미 회장의 친필 서명이 들어있다. 얼마 전 방한 때 선물로 받았다.
한국과 일본의 두 가치투자자의 생각은 한결같다. ‘쌀 때 산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 시장은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이 부사장은 강조했다.
이 부사장은 “현재 우리나라 시가총액은 1100조원, 올해 예상 연간 당기순이익은 90조원으로 주식 수익률이 8%가 넘는다”면서 “7월 기준 채권금리가 3.11%임을 감안하면 무려 5%포인트 이상 격차가 난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역사적 저점이고 이론상 적극 매수 시점임에 틀림없지만 각종 리스크로 인해 마음은 편치 않다고 했다.
자산 포트폴리오는 주식에서 기대할 수 있는 수익이 최근 서울 시내 수익형 부동산의 이익률(3~5%)보다 높음을 감안해 ‘주식>부동산>채권’순으로 구성이 필요한 때라고 전했다.
그는 “자산배분전략에는 왕도가 없다”면서 “수시로 체크해 자산 구성을 조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문제는 싼 주식을 찾는 법이다.
이 부사장은 “가치의 3대 요소는 수익ㆍ자산ㆍ성장 가치로 볼 수 있다”면서 “얼마나 잘 벌고 있는가(수익), 기존에 벌어둔 돈이 얼마나 있는가(자산), 앞으로 벌 돈이 얼마나 되는가(성장)의 차이”라고 말했다.
시장이 지금처럼 성장이 불확실할 때는 수익과 자산 가치가 부각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주가수익비율(PER)이나 주가순자산비율(PBR)이 낮은 종목이 그것이다.
그는 “성장이 둔화되면 사람들은 막연한 성장보다는 손에 잡히는 가치를 추구하는 한편, 새로운 성장동력에 대한 강한 목마름이 생기게 된다”면서 “따라서 닷컴버블처럼 성장성이 보이는 곳으로 쏠림현상이 벌어지는 것인데 보수적 투자자나 가치투자자가 살 만한 신성장주는 제한적으로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yjsung@heraldcorp.com
◆이채원 부사장이 걸어온 길 *1964년 경북 포항 출생
*1980년 배재중 졸업
*1983년 도쿄 세인트메리즈인터내셔널 졸업
*1989년 중앙대 경영학 학사
*1988년 동원증권 국제부 역외펀드
*1996년 동원투자신탁운용 주식운용부장
*1998년 국내 최초 가치투자펀드 이채원 1호 설정 및 운용
*2000년 동원증권 주식운용팀장
*2002년 동원투자신탁운용 자문운용실장
*2005년 한국투자증권 자산운용본부장
*2006년~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부사장 및 최고운용책임자(C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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