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탓만 하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시정연설은 국정운영에 발목을 잡을 것이 뻔하다. 중국 칭화대에서의 명연설(?)처럼 국민을 감동시키지는 못해도 좋다. 다만 “뭔가 변하겠구나”하는 일말의 실마리라도 줘야 한다.

지난 6월 중국 순방 당시 청와대 한 관계자는 박근혜 대통령의 칭화대 연설에 대해 “감동 그 자체였다”고 했다. 중국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시의적절한 비유로 중국 젊은이들을 사로잡는 박 대통령의 모습은 그냥 입에 발린 말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4개월여가 흘렀다. 박 대통령은 다음달 중순께 국회를 찾아 시정연설을 한다고 한다. 국회를 자주 찾아 ‘여의도 정치’와 소통을 이어가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여의도 정치 때문에 될 일도 안 된다’며 여의도에 저주(?)를 퍼붓곤 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과는 다른 모습이다.

이번 시정 연설은 국정원 댓글 의혹과 ‘수사외압’ 논란 등 정국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꺼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미국의 도청행각이나,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에 열을 올리는 상황에서 대통령의 시정연설은 대미ㆍ대일 외교에 대한 정부의 고심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청와대 관계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벌써부터 ‘그러면 그렇겠지…’ 김이 빠진다. 박 대통령의 이번 시정연설에 대해 한 청와대 관계자는 “야당이 말을 들어야죠. 상대가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데 뭔 말을 할 수 있나요”라고 반문한다. 또 다른 관계자도 “정홍원 총리의 대국민 담화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았나요”라고 말끝을 흐린다.

시정연설 역시 ‘침묵의 정치’를 펼치고 있는 지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한 여권 관계자는 이에 대해 “뭐가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말했다가는 ‘대통령이 전에 이렇게 말하지 않았냐’는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시계가 흐려서 안 보일 때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는 변명도 한다.

하지만 대통령의 침묵 한편에는 야당에 대한 믿음도, 정치에 대한 믿음도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대통령의 침묵을 야당 탓으로 돌리고, 경제가 어려운 것을 제 역할을 못하는 정치 탓으로 돌리는 대통령과 청와대의 인식엔 뭔가 크게 응어리진 것 같은 인상마저 든다. 원자력발전 부품 비리 등 사회적으로 반향이 큰 문제에 대해 계속해서 ‘역대 정부’ ‘새 정부’하며 편가르기 하는 박 대통령의 어법을 떠올리면 뭔가 ‘비정상’이 계속되고 있다는 느낌마저 받는다.

지난 30일 재ㆍ보선 2곳에서 새누리당이 큰 표 차로 이기고, 박심(朴心)을 그 누구보다 잘 안다는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까지 국회에 입성했으니 정국을 바라보는 박 대통령의 프레임이 한층 더 굳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그러다보니 올드보이 친정체제 구축으로 국정운영에 힘을 낼 수 있는 발판이 되레 ‘민심’을 오판하는 독(毒)이 될 수도 있다.

역대 대통령으로는 네 번째로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하는 박 대통령이 이번에는 전환점을 만들어주길 희망하는 게 꿈이 아니기를 바란다. 첫 국회 나들이(여야 3자회동)에서의 ‘아픈 기억’은 잊어야 한다. 네 탓만 하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입에 단말만 삼키려는 시정연설은 국회를 무슨 벌레마냥 생각했던 역대 대통령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중국 칭화대에서의 명연설(?)처럼 국민을 감동시키지는 못해도 좋다. 다만 “이젠 뭔가 변하겠구나”하는 일말의 실마리라도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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