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현지에서 납치, 피살된 한인의 죽음 뒤에 현지 경찰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은 전 국민을 분노로 들끓게 했다. 고인의 명예를 회복하고 유가족을 위로하며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외교적 대응은 단호하게 해야 하겠지만 앞으로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도 경찰 간 협력은 지속돼야 한다.
지난해 10월 필리핀 루손 섬 앙헬레스 시에서 한국인 사업가 지모(53) 씨가 마약 혐의를 날조한 현지 경찰관에 의해 납치된 후 살해됐다. 더욱 놀라운 것은 범행 장소가 필리핀의 경찰청 본부라는 사실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마약과의 전쟁’ 과정에서 영장이나 재판 없이도 용의자를 즉결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경찰관에게 부여했지만 이번 사건은 필리핀 경찰이 그만한 능력과 책임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극명히 드러냈다. 필리핀 경찰은 자신의 조직 구성원이 자신이 가진 무력을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기 위해 범죄에 사용하는 것을 막지 못 했다. 엄연한 국가의 실패다.
사실 필리핀 경찰이 범죄에 연루된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다. 필리핀에서 경찰이 되려면 상부에 큰 돈을 상납해야 하고 그 빚을 갚기 위해 심지어 범죄에 가담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점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런 만큼 우리 외교 당국이 필리핀 정부의 진심 어린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을 받아내기 위해 단호하게 대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번 사건에 대해 “정부는 자국민 보호를 강화하고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는 등 강력한 외교적 대응을 하라”고 주문한 바 있다.
그러나 외교적 대응과는 별도로 현재 코리안데스크를 통해 이뤄지고 있는 현지 경찰과의 협력체계는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최근 매년 필리핀에 거주 또는 방문하는 우리 국민 10여명이 납치ㆍ살해되고 있다는 점은 엄연한 현실로 남아있다.
현지 경찰의 구성원 장악력이 떨어진다는 점이 오히려 협력의 필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일단 한인 관련 범죄가 벌어지면 그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우리 경찰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다.
현지 경찰의 업무는 과중하고 인력은 부족하며 수사기법이 뒤떨어진 상황에서 자국민이 아닌 한인의 피해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수사에 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의 진범을 잡는 과정에서도 우리 경찰이 CCTV영상을 분석해 용의자의 특성을 분석, 결정적 단서를 현지 경찰에 제공했다.
이같은 차원에서 이철성 경찰청장은 25일 로날드 델라로사 필리핀 경찰청장에게 서한을 보내 공정ㆍ신속한 수사와 관련자 엄중 처벌, 한인 대상 범죄 재발 방지 노력을 촉구했다. 오는 2월 14일에는 김귀찬 차장을 파견해 현지 경찰과 고위급회담을 열고 대책마련을 촉구할 예정이다.
일순간의 분노로 치안협력을 중단한다고 해서 교민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위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슴 속의 분노를 차갑게 식혀 냉철한 대응책을 마련할 때다.
why37@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