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그의 아버지는 일찍 죽었고 어머니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했다. 엄혹한 시대는 그의 정신과 영혼에 상처를 남겼다. 트라우마(정신적 외상)가 깊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었다. 그는 어디서나 외톨이였다. 그는 정상적인 사회와 관계로부터 유폐되고 고립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불안과 고독, 왜곡된 충동에 휩싸여 자기 파괴적인 생활을 하던 그에게 어느날 구원의 손길이 다가온다. 상대는 사교(邪敎)의 창시자였다. 시대의 황폐함을 먹이 삼아 세력을 키운 신흥 종교의 교주였다. 그와 교주는 우연한 첫 만남에서 서로에게 이끌렸다. 운명적으로,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감지했다. 세상 그 누구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했던 그의 존재는 교주에게서야 비로소 긍정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교주는 그에게 아버지와 같았다. 교주에게 그는 교리(敎理)의 실험 대상이자, 교리의 바깥에 있던 교주의 숨겨진 욕망과도 같았다. 교리 포교와, 특히 종교를 바탕으로 확장세를 거듭하던 사업에서 하나의 고리가 될 수 있었다. 교주와 그의 사이는 유사 부자관계이기도 했고 스승과 제자였으며, 교주와 신도, 치유자와 피치유자, 정서적ㆍ사업적 동반자이기도 했다.
미국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2012년작 ‘마스터’다. 불우한 성장과정을 거쳐 남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한 한 청년 프레디(호아킨 피닉스 분)와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던 사교의 교주 랭케스터(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분)의 관계를 그린 작품이다. 영화는 프레디가 제 2차 대전에 미국 해병으로 참전한 후 제대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 전쟁의 상흔까지 갖게 된 프레디는 알콜에 탐닉하며 어느 누구와도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갖지 못하고 고립되고 파괴적인 생활을 한다. 그에게 구원자로 다가온 랭케스터는 독특한 정신치료법을 내세운 ‘코즈’라는 단체를 이끄는 인물이다. ‘코즈’는 일종의 사교다. 영화는 겉으로는 프레디가 랭케스터를 ‘마스터’(주인)로 받아들이면서 겪는 심리적인 변화가 축이 된다. 그 이면은 랭케스터 역시 갖게 되는 프레디에 대해 심리적인 의존이다.
랭케스터의 곁에서 그의 가족과 사업 세계로 들어간 프레디는 랭케스터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인간임을 깨닫는다. 프레디는 떠남과 만남을 반복한다. 결국 둘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랭케스터는 전후 미국의 신흥종교인 사이언톨로지의 창시자 론 허바드를 모델로 창조된 캐릭터다.
프레디는 사실상 심신미약의 상태나 다름 없는 인물이다. 랭케스터는 허약한 그의 정신을 파고든다. 프레디에겐 일종의 절대자와 같은 존재다.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형성된다. 주인과 노예다. 그러나 랭케스터에겐 비밀이 있다. 자신의 교리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술을 즐긴다. 프레디는 밀주를 만들 수 있다. 랭케스터는 프레디가 자신의 교리를 실험하고 포교하는 대상인 한편으로 알콜의 공급자이기도 하다. 이 관계는 상징적이기도 하다. 자신이 만든 교리에 묶여 절제와 억압의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랭케스터에게 프레디는 잊혔던 야성이자 숨겨진 욕망이기도 하다. 심리적 의존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이다.
누구나 다른 이에게 영향을 주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 권력 의지다. 모든 인간 관계 사이에는 힘이 작동한다. 그 힘은끊임없이 우열을 드러낸다. 가족간에도 연인간에도 친구간에도 마찬가지다. 조직과 집단, 사회의 차원에서 개인과 공공의 이해를 둘러싼 영역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는 권력, 정치라면,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작동하는 힘의 영역은 미시권력이자 미시정치학의 세계다. ‘마스터’는 프레디와 랭케스터를 통해 미시권력과 미시정치학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 작품은 1950~60년대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프레디와 랭케스터의 관계를 통해 읽혀지는 것은 전후 황폐한 미국 사회의 풍경이다. 정신적인 불안과 왜곡된 관계의 개인에겐 ‘절대자’와 ‘절대교리’의 교설에 허약하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한국사회에서도 수많은 사교와 신흥종교들이 명멸했다. 그 한 자락이 청와대까지 닿았다는 의혹이 여기저기서 제기된다.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본인이 사교와 연관이 없음을 해명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발단은 국정농단 의혹을 받고 있는 최순실씨와 그의 가계다.
영화 속 랭케스터와 그 가족에게 포교는 곧 돈을 목적으로 한 사업이었다. 사교는 반드시 돈과 연관된다는 점도 영화에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마스터’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작품이 1950~60년대 미국사회의 황폐한 풍경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최근 국민들을 분노와 좌절로 몰고간 최순실씨 국정농단 의혹은 여러모로 과거의 망령이 한국사회에 가하는 사후 복수라는 생각이 들도록 한다. 샤머니즘, 개인에 의한 시스템의 파괴, 개인의 일탈로 무너진 허약한 시스템, 그리고 정경유착. 개인에 의한 ‘사교’의 숭배도 문제지만, 더 근원적인 것은 강한 영웅을 희구했던 우리 사회의 허약함이다. 강한 영웅, 독재자가 지배했던 과거에 대한 어떤 세대, 혹은 우리 사회 안의 뿌리깊은 열망이 이 모든 사태의 근원이 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최순실씨와 박근혜 대통령, 그리고 4년간 박근혜 정부의 정책을 둘러싼 각종 의혹들은, 해방 이후 산업화와 민주주의 과정에서 우리 사회가 애써 눈감으려했던 적폐일 수도 있다. 곪아왔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미래를 위해서라면 차라리 다행일 수도 있다. 그것을 우리 사회가 근원적으로 청산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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