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비엔날레 ‘허끄곡 모닥치곡 이야홍…’

20개국 69팀 참여…도립미술관 등 개최

제주 고유 문화에서 출발해 세계로 확장

“예산·인력 부족…전담 조직 만들어야”

제주아트플랫폼에 전시된 자나 카디로바의 ‘퍼포먼스(Performance) VI’. [김현경 기자]
제주아트플랫폼에 전시된 자나 카디로바의 ‘퍼포먼스(Performance) VI’. [김현경 기자]

[헤럴드경제(제주)=김현경 기자] 유배 온 사람들의 넋이 제의와 만나고, 외지에서 떠내려온 문화가 본토에 뿌리를 내린다. 신화로 전해진 이야기들은 현대인의 삶과 연결된다.

‘2026 제5회 제주비엔날레’가 8월 25일 막을 올린 후 11월 15일까지 83일간 이어진다. 20개국 69팀의 국내외 작가가 참여한 이번 비엔날레는 제주도립미술관,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 제주아트플랫폼, 예술공간 이아, 갤러리레미콘 등 5개 장소에서 열린다.

올해 주제는 ‘허끄곡 모닥치곡 이야홍: 변용의 기술(The Art of Metamorphosis)’이다. 제주어로 ‘섞고, 모으고, 흥을 돋운다’는 뜻으로, 제주의 토착 문화가 외부 문명과 만나 융합되며 새로운 형태로 변해온 과정에 주목한다.

제주에서 만난 이종후 제주도립미술관 관장 겸 제주비엔날레 예술감독은 “제주는 섬 내부의 고유한 정체성이 외부의 영향을 중층적으로 받아들이며 전혀 색다르게 변용됐다. 유배를 오거나 정치적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계속 이슈가 돼 왔고, 신화의 경우 포용성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변용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며 다양한 주체를 한자리에 겹쳐놓는다. 서로 섞이는 과정에서 지역성은 보편성으로 나아가고, 나와 타자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이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을 위한 담론으로 수행된다. 이 감독은 “미래에 대한 공존의 가능성,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논리를 고민해 보려 했다. 현재 전 지구적으로 산재한 문제를 제주 문화 안에서 들여다보고자 했다”며 “제주를 깊이 들여다봄으로써 세계와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종후 제주도립미술관 관장 겸 제주비엔날레 예술감독이 17일 제주도립미술관에서 제주비엔날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현경 기자]
이종후 제주도립미술관 관장 겸 제주비엔날레 예술감독이 17일 제주도립미술관에서 제주비엔날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현경 기자]

‘유배’의 역사, 동시대와 만나다

전시는 ‘유배’, ‘돌문화’, ‘신화’의 세 가지 소주제로 나뉘어 권역별로 펼쳐진다.

먼저 제주도립미술관에선 ‘추사의 견지에서: 유배’가 열린다. 제주 대정으로 유배 온 추사 김정희가 남긴 ‘세한도’에서 출발해 강요배의 ‘도새기 통시’, 백남준의 ‘TV 첼로’, 이우환의 ‘점으로부터’, 변시지의 ‘풍파’, 서세옥의 ‘사람들’, 이현태의 ‘어김없는 것과 어긋나는 (거)’등 근현대 작가들의 작품이 함께 놓인다.

미술관 시민갤러리에 설치된 이진경의 신작 ‘나는 그 초록인가’는 정약용의 조카인 정난주를 비롯해 제주에 유배된 역사 속 인물들과 양제해의 난부터 이재수의 난까지 제주 민란을 다룬다. 바다에 흘러온 나무에 먹으로 그린 초록과 한지·캔버스에 그린 인물, 제주 바다의 소리와 민요가 어우러진 사운드가 공간을 가득 채운다. 작가는 상흔을 남긴 역사를 다시 호출하면서도 비극에 머물지 않고, 끝내 꺾이지 않은 ‘초록’을 찾는다.

전시장 구석에는 작가가 재해석한 사당이 있다. 17일엔 서순실 심장의 굿 ‘다시 살으라’ 초감제가 열려 하늘과 땅의 신을 청하고 산 자의 안녕을 기원했다.

제주도립미술관의 이진경 ‘나는 그 초록인가’ 전시장에서 17일 서순실 심장의 굿 ‘다시 살으라’ 초감제가 열리고 있다. [김현경 기자]
제주도립미술관의 이진경 ‘나는 그 초록인가’ 전시장에서 17일 서순실 심장의 굿 ‘다시 살으라’ 초감제가 열리고 있다. [김현경 기자]

미술관 입구에 있는 연미의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고, 햇살이 비추면 햇살을 받고’는 오래된 밥상 위에 글씨가 쓰인 콩주머니들이 놓인 설치 작품이다. 밥상은 제주 할망(할머니)들이 직접 사용했던 것으로, “덕분에 살았져”, “울멍 살았지”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그 위에는 방문객들이 건강, 대학 입학, 행복 등의 염원을 담은 주머니가 쌓여 다양한 이들의 삶을 연결한다.

미술관 외부의 거울연못에는 프랑스 대지미술가 피에르 파브르의 ‘제주 라바(Jeju lava)’가 설치돼 있다. 분출하는 용암을 연상시키는 붉은 띠들은 중산간 바람에 흔들린다. 작가는 “4회 제주비엔날레 당시 연못을 보고 이곳에 설치하고 싶다고 생각했다”면서 “제주 용암이기도 하지만 화산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뭔가를 생성하고, 인류의 흔적을 보존하는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돌문화’로 보는 자연과 문명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에 전시된 노진아의 ‘진화적 키메라-가이아’. [김현경 기자]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에 전시된 노진아의 ‘진화적 키메라-가이아’. [김현경 기자]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에서 열리는 ‘검으나 돌은 구르고 굴러: 돌문화’ 전시는 화산이 빚어낸 돌을 통해 자연과 문명을 이야기한다.

노진아의 ‘진화적 키메라-가이아’는 인공지능(AI) 머리에 인류의 진화를 본뜬 조각들이 몸통으로 연결된 모습으로, 인간과 기계가 한 생태계로 함께 진화할 수 있는지 되묻는다. AI는 관람객의 질문에 답하며 인간을 작품으로 끌어들인다.

김정헌은 우주 생명의 토양인 흙과 고대로부터 미래까지 이어지는 장구한 시간을 관통하는 뿌리, 그 안에서 자라나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종이, 철 파이프, 도자, 돌 등을 혼합해 만든 조각 작품을 통해 문명이 수많은 존재와 물질, 시간과 만남을 거듭하며 형성돼 왔음을 보여준다.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에 전시된 김현성 ‘담지체’. [김현경 기자]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에 전시된 김현성 ‘담지체’. [김현경 기자]

김현성의 ‘담지체’는 물레에 놓인 돌을 관람객이 회전시키면 막대에 부딪혀 소리가 나는 작품이다. 원형으로 설치된 다수의 돌을 여러 사람이 돌리면 각기 다른 소리가 얽혀 하나의 울림을 만들어낸다.

오카베 마사오는 프로타주 작업 ‘타임 링스(TIME RINGS)’에서 역사 이전, 역사, 현재의 시간과 제주, 홋카이도, 히로시마의 공간을 잇는다. 구 마이노우치 비행장 활주로에 남겨진 발자국을 떠낸 그림에는 일본인과 함께 강제 징용된 한국인의 맨발도 담겨 있다. 작가는 제주도의 알뜨르 비행장을 방문했을 당시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하루 종일 프로타주를 하기도 했다.

갤러리 입구와 뒤편에는 비엔날레 홍보대사인 김창옥의 작품도 놓였다. 그는 돌챙이(석수)였던 아버지와 자신의 고향인 제주에서 작업을 하며 얻은 치유를 관람객들에게 전한다.

1만8000신의 땅에 펼쳐진 ‘신화’

예술공간 이아에 설치된 김영화의 ‘날과 씨’. [김현경 기자]
예술공간 이아에 설치된 김영화의 ‘날과 씨’. [김현경 기자]

제주아트플랫폼, 예술공간 이아, 갤러리레미콘이 있는 원도심에선 ‘큰 할망의 배꼽: 신화’가 이어진다. 1만8000명의 신이 있다고 할 정도로 다신(多神)의 땅인 제주에서 현대의 감각으로 재탄생한 신화가 펼쳐진다.

조선 시대 제주 목사를 보좌하던 관청 이아의 터에 들어서 자혜의원과 제주대학교병원으로 한 세기를 보낸 예술공간 이아, 아카데미극장을 되살린 제주아트플랫폼, 제주 최초의 현대식 호텔이었던 명승호텔이 변신한 갤러리레미콘은 역사가 중첩된 전시장 자체가 작품이 된다.

예술공간 이아의 전면과 후면에는 원도심을 지켜 온 녹나무에 김영화의 ‘날과 씨’가 설치돼 있다. 작가는 오랜 시간 제주를 목격한 나무를 누군가의 기도를 하늘까지 이어주는 신목이자 우주목으로 상상했다.

작가는 “물들인 실을 엮어 나무에 설치하는 작업 과정 자체가 하나의 비념이었다”며 “기도가 나무에 스며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위에서 시작한 실이 땅의 뿌리로 연결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김상돈은 탐라국 건국 신화의 삼을나와 심방이자 해녀인 네 여신을 교차시킨 신작 ‘거울 속 열쇠들’을 선보인다.

예술공간 이아에 전시된 김상돈의 ‘거울 속 열쇠들’. [김현경 기자]
예술공간 이아에 전시된 김상돈의 ‘거울 속 열쇠들’. [김현경 기자]

제주아트플랫폼에선 우크라이나 작가 자나 카디로바가 제주 할망과 도민들이 그린 초상화를 모아 옛 극장에 세운 ‘퍼포먼스(Performance) VI’을 만날 수 있다. 강희선, 허계생, 김인자, 김옥순 등 할망들을 비롯해 도민들이 그린 자화상과 가족, 친구의 모습 등 개성 있는 작품 61점이 관객석에 자리한다. 관람객은 무대에서 얼굴들을 바라보며 개인의 기억과 제주의 역사, 동시대의 연대로 이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갤러리레미콘에서는 한국의 젊은 작가 세 명이 색다른 작품을 펼친다. 김희은의 ‘문전(門前)’은 웹앱 본풀이 공동체로, 제주 곳곳의 비엔날레 전시장에서 관객이 QR 코드에 접속하면 신호를 받아 본풀이 장이 구현되는 관객 참여형 프로젝트다. 관객이 접속할 때마다 전시장의 키네틱 작품 ‘바람, 질서’에 바람이 일어나며 흔들린다.

구기정의 ‘초과된 풍경’은 제주를 식생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며 이끼, 고사리 같은 자연을 디지털로 재구성하고 흙과 현무암을 함께 배치해 실재와 가상의 경계를 지운다. 양정욱의 ‘지금은 신이 되었다’는 나무와 모터로 만든 키네틱 조각들이 평범한 일상 속 연대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갤러리레미콘에 전시된 김희은의 ‘문전(門前)’. [김현경 기자]
갤러리레미콘에 전시된 김희은의 ‘문전(門前)’. [김현경 기자]

제주와 세계의 소통…“예산·인력 확충해야”

비엔날레는 제주에서 출발하지만, 제주에만 머물지 않고 다른 지역과 세계로 확장한다. 지역의 고유한 언어와 문화가 어떻게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국제적 규모의 큰 행사가 없는 제주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행사라는 점에서도 제주비엔날레는 의미가 깊다.

이종후 감독은 “제주비엔날레는 제주가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채널이다. 계속 진행돼야 한다”며 “제주의 문화적 정체성과 지형이 전 세계 예술인들에게 공감의 장을 마련하고, 제주 문화 생태계 안에서도 향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다른 지역에서 비엔날레가 많이 있지만 제주도민들이 보려면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한다. 제주 안에서 문화를 누릴 기회이기도 하다”면서 “제주의 공동체, 미래 세대의 존재 방식을 시사하는 부분이 있다”고 덧붙였다.

제주도립미술관에서 관람객들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제주비엔날레 제공]
제주도립미술관에서 관람객들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제주비엔날레 제공]

부족한 예산과 인력에 대해선 아쉬움을 표했다. “비엔날레는 80여일 동안 진행되는데, 3~4일 열리는 단일 행사와 비슷한 예산이 배정된다. 전담 조직이 있어야 한다”며 “1회 때 예산이 16억원 정도였는데 점차 줄어서 4회 때 8억원까지 낮아졌다. 지난번에 관람객이 10만명 이상 방문해서 이번 예산은 약 16억원이 배정됐지만, 물가 상승과 환율, 운송비 상승 등을 감안하면 10년 전보다 더 떨어진 셈”이라고 호소했다.

올해 임기를 마치는 이 감독은 “제주비엔날레는 미술관에서 운영한다는 리스크가 있다. 10년 동안 충분히 인큐베이팅했고 이제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됐다”며 “전담 조직 도입에 대한 의회, 미술관, 예술인 등 이해관계자들의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봤다.

그는 “광주처럼 비엔날레 재단이 독립되면 가장 좋겠지만 실질적으론 불가능해 보인다. 창원, 전남 비엔날레는 광역 재단에서 운영하는데, 제주문화재단에서 하면 행정 조직인 도립미술관보단 유연해질 수 있다”고 했다.

제주비엔날레 입장권은 제주도립미술관에서만 성인 8000원이며, 나머지 4개 전시 공간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pink@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