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인의 목소리로 만든 첫 수어방송 지침서
특별한 자문위원 농인 정가은 학생 인터뷰
“‘농인의 언어’ 수어, 표정·몸짓까지 담아야”
“꿈은 인권변호사…느려도 변하는구나 희망”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지난 8월,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와 시청자미디어재단은 ‘한국수어통역방송 실무지침’을 내놨다. 수어통역의 원칙부터 장르별 실무, 돌발상황 대응법까지. 그동안 뚜렷한 기준 없이 진행돼 온 수어통역방송에 대해 처음으로 만든 매뉴얼이다.
누군가에게는 방송 실무자를 위한 수많은 지침 중 하나일지 모르지만, 농인들에겐 미디어를 온전히 누리고 싶었던 오랜 바람이 이 한 권에 촘촘히 녹아 있다. 그동안 수어통역방송을 만드는 현장에선 농인의 목소리가 좀처럼 귀 기울여지지 않았지만, 이 지침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의 목소리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지침을 만들기 위해 구성한 자문위원회에는 특별한 위원이 있다. 대입 준비에 한창인 정가은(20) 학생이다. 그는 지침서를 만들기 위해 모인 현장 전문가와 통역사, 학계 인사 사이에서 태어날 때부터 수어를 모어로 써 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꾸준히 전했다. “수어는 손이 아니라 표정과 눈빛, 몸짓과 공간이 다 합쳐져야 비로소 하나의 언어가 돼요.” 정 씨의 첫마디에, ‘수어는 손끝의 언어’라 여겨졌던 오랜 오해가 조용히 사라졌다.
정가은 학생을 만나기 위해 최근 서울 강북구에 위치한 ‘소리를보여주는사람들’을 찾았다. ‘소리를보여주는사람들’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수어를 중심으로 가르치는 농인 대안학교다. 인터뷰는 김주희 소리를보여주는사람들 교장의 동시통역으로 진행됐다.
수어통역방송 의무편성제도가 도입된 것은 지난 2011년이다. 이후 수어통역방송은 양적으로 성장했지만, 정작 핵심 정보가 누락되거나 잘못 전달되는 사례가 반복됐다. 돌발 상황이나 서로 다른 장르의 프로그램에서 어떻게 통역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렇다할 기준도 부재했다. 이에 현장의 혼선은 불가피했고, 그로 인한 불편은 고스란히 미디어 수용자인 농인들의 몫으로 남았다.
정 씨가 지침서 제작에 참여하게 된 것도 농인으로서 가져 온 수어통역방송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농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나 수어를 모어로 배우고 자란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수어통역 탓에 방송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적이 많았다. 자막이 있지만, 그것은 청인의 언어를 문자로 옮겨 놓은 것뿐이다. 농인의 언어인 수어와는 다소 다르다.
정 씨는 “자막과 수어통역이 함께 나오는 방송을 봐도 자막과 통역 내용이 다른 경우들이 있고, 드라마는 수어통역이 있다고 해도 감정까지 전달받기 어렵다”면서 “자막을 읽을 줄 모르는 부모님은 통역이 잘못되면, 잘못된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그가 생각하는 잦은 통역 오류의 원인은 사회가 수어에 대해 갖고 있는 단편적인 인식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수어가 손동작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수어는 손이 아니라 표정, 눈동자, 몸의 움직임, 공간까지 다 합쳐져야 비로소 하나의 언어가 돼요.”
통역 오류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정 씨는 손동작 외에 공간과 모든 것을 활용하는 수어 고유의 문법을, 청인 통역사들이 놓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한다.
더 큰 문제는 청인 문화에 대한 이해였다. 예능이나 드라마에서 나온 청인 중심의 표현들이 그대로 수어로 옮겨지면, 청인에겐 익숙한 의미의 단어나 문장들이 농인 시청자에게는 불현듯 낯선 언어로 전달되는 경우가 생겼다. “청인들이 갖고 있는 문화를 그대로 농인의 것으로 바꿀 수는 없어요.” 정 씨는 ‘캥거루족’이란 단어를 예로 들었다.
“‘캥거루족’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왔을 때, 청인들은 곧바로 캥거루 주머니 속 새끼의 이미지를 떠올리잖아요. 그런데 그걸 그대로 수어로 옮기면 농인들은 직관적으로 뜻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농인 사회에선 오래전부터 캥거루족과 같은 의미를, ‘젖병을 물고 있는’ 손동작으로 표현해왔거든요.”
정 씨는 통역사들이 농사회를 좀 더 충분히 경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사회가 지금이라도 미디어 접근성을 둘러싼 농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반갑다. “이 수어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저희를 배제하고 누구에게 평가받을 건가요.” 정 씨가 바라는 건, 이런 분위기가 더 확산돼 수어통역에 농인들이 자연스럽게 참여하는 흐름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수어통역은 청인 전문가들끼리 완성하는 연구가 아니라, 농인들이 살아온 생생한 경험이 기준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대입을 준비 중인 그가 품고 있는 꿈은 인권 변호사다. 농인의 인권활동에 앞장서는 것이 그가 바라는 미래의 모습이다. 정 씨는 이번 지침서 제작에 자신을 비롯한 농인들이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사회가 비록 느리더라도 변화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봤다고 했다.
정 씨는 “농인들의 권리를 제고하기 위해 실천하는 현장을 경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면서 “나와 같은 사람이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회가 한 번에 바뀌지는 못하더라도 천천히 바뀌어갈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고 말했다.
검정고시로 의무교육과정을 마친 그는 내년이면 대학생이 된다. 설렘만큼 두려움도 크다. “청인들 사이에서 농인으로 잘 해낼 수 있을까요.” 동등하지 않은 위치에서 자신의 언어와 자신을 설득해야 하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을, 그는 이미 예감하고 있다.
인공와우를 하는 아이들이 늘고, 수어를 오래 지켜온 어른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시대. 그 안에서 ‘온전히 농인의 언어인 수어’를 어떻게 지켜나갈지는, 그에게 남겨진 또 다른 숙제이다.
그럼에도 그가 들려준 마지막 이야기는 마냥 무겁다기 보다 즐겁고 행복한 쪽에 더 가까웠다. 그는 “농인의 인생은 즐겁다. 너무 재밌다”며 “이 즐거운 삶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주고 싶다”고 말한다.
수어에는 청인의 언어가 따라갈 수 없는 표정과 강약이 있다고, 그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정 씨는 수어가 농인들만의 고유한 비수지(非手指) 신호가 만들어내는 세계라고 생각했다. 그 세계만이 담아낼 수 있는 유머를 더 넓은 세상과 나누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는게 그의 생각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몰라서 너무 안타까워요.” 얼굴을 보고 웃기는 식의 단순한 유머가 아니라, 수어를 보고 있으면 한 편의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몰입감. 그것이 사회와 함께 숨쉬고 있는 농인의 고유한 언어, 수어가 갖고 있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온기[溫記]](https://wimg.heraldcorp.com/svc/series/202601/2b3df642-aa35-42bd-a9e6-cb4ad932be11.p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