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도 경력이 되는 서울…여성의 ‘멈춘 시간’을 다시 잇는다
AI로 일자리·돌봄·안전 잇는다…기술 넘어 ‘공정성’까지
가구 형태보다 ‘삶’을 본다…서울 여성·가족정책의 새 설계
“정책의 답은 시민의 일상에…공공이 먼저 혁신해야”
[헤럴드경제=양정원 기자] 가사와 가족돌봄에 쏟은 시간은 이력서에서 ‘공백’으로 남는다. 아이를 키우거나 부모를 돌보기 위해 직장을 떠난 사람이 다시 노동시장에 진입하려 하면 그동안 축적한 경험과 역량을 제대로 인정받기 어렵다.
박정숙 서울시여성가족재단 대표이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여성·가족 정책이 달라져야 한다고 봤다. 취업자 수나 사업 참여자 수를 늘리는 데 머무르지 않고 한 시민이 일과 돌봄을 함께 이어갈 수 있도록 삶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것이 정책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박 대표는 지난 16일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재취업 자체가 정책의 종착점이 돼서는 안 된다”며 “돌봄 때문에 일을 포기하지 않고, 일 때문에 가족생활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가 취임 이후 강조해 온 기준도 여기에 맞춰져 있다. 사업의 숫자보다 시민의 생활에서 확인되는 변화다. 제한된 재원 안에서 효과를 높이기 위해 민간과 공공의 협업을 넓히고 각각 떨어져 있던 사업과 정보를 묶는 작업에도 집중했다.
특히 박 대표는 “공공기관은 오히려 민간보다 더 혁신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민의 요구와 사회환경이 빠르게 변하는 상황에서 기존 사업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공공기관의 역할을 다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재단이 올해 주목한 분야 가운데 하나는 가사·돌봄 경험의 재평가다.
그동안 취업 현장에서 공백으로 취급되기 쉬웠던 가사와 가족돌봄 활동을 실제 업무 역량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국가직무능력표준(NCS)을 기반으로 21개 직무기술서를 개발했다. 돌봄 과정에서 쌓은 일정관리, 의사소통, 문제해결 등의 경험을 취업 과정에서 설명할 수 있도록 ‘직무의 언어’로 바꾼 것이다.
여성의 노동시장 복귀를 지원하는 방식도 한 단계 넓히고 있다. 구직지원금과 인턴십, 고용장려금을 연계한 ‘서울커리업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한편 IT·AI 분야 학습 커뮤니티 ‘서울 우먼잇츠’를 통해 여성들의 새로운 산업 진입을 지원하고 있다.
서울 우먼잇츠에는 재직자와 관련 분야 취업 희망자 등 360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참여자가 필요한 학습 주제를 직접 제안하고 현업 전문가와 경험을 공유하는 방식이다.
다음 단계는 개인별 경력 설계다. 재단은 경력이 중단된 이유와 재취업 목표, 보유 역량 등을 종합해 각자에게 필요한 경로를 제시하는 ‘서울형 커리어 패스’ 모델을 개발해 시범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자율학습 스터디와 전문가 워크숍, 단기 지식공유 프로그램인 ‘밋업’도 확대한다.
AI가 사람을 대신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돕게
박 대표가 또 하나의 변화 축으로 꼽은 것은 인공지능(AI)이다. 다만 기술 자체가 목표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재단은 ‘스마트 우먼 프로젝트’를 통해 AI와 디지털 기술을 여성의 경제활동, 아동돌봄, 범죄피해 대응, 행정 분야에 적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현장이 디지털성범죄 피해지원이다. 서울 디지털성범죄 안심지원센터는 2022년부터 2025년까지 피해자 4333명을 지원했으며 누적 피해지원은 약 9만9000건이다. AI를 활용해 불법촬영물을 탐지하고 영상의 유사도를 분석해 삭제를 지원하는 24시간 대응체계도 강화했다.
기술 도입은 피해자뿐 아니라 지원 인력의 업무환경도 바꾸고 있다. 불법 영상물을 사람이 일일이 확인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심리적 충격과 2차 트라우마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집 행정에도 AI가 들어왔다. 회계 관련 반복 문의를 처리하는 ‘AI 안심회계봇’은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필요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2025년 기준 누적 상담은 4282건이며 유선 상담과 비교한 무인 해결 비율은 1.5배 수준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박 대표가 AI 활용만큼 강조하는 것은 ‘AI를 감시하는 기준’이다.
재단이 생성형 AI 결과물을 분석한 결과 전문직과 리더를 남성 중심으로 표현하거나 돌봄과 가사를 여성의 역할로 묘사하는 등의 성별 편향이 나타났다.
박 대표는 “AI를 얼마나 많이 사용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결과가 양성평등하고 공정한지를 살펴야 한다”며 “편향을 진단하고 수정할 수 있는 도구와 활용 지침을 갖추고 중요한 정책 판단과 책임은 사람이 맡는 ‘휴먼 인 더 루프(Human-in-the-Loop)’ 원칙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서울의 가족정책을 바라보는 기준도 달라지고 있다.
2026년 서울 전체 가구에서 1인가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40.5%에 이른다. 그러나 ‘1인가구’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놓인 시민들의 삶은 같지 않다. 청년에게는 취업과 주거가 중요한 문제일 수 있고, 중장년층은 가족관계 변화, 고령층은 배우자 사별과 자녀 분거 이후의 고립이 더 큰 과제가 될 수 있다.
맞벌이 가구 역시 마찬가지다. 전국 배우자가 있는 가구 가운데 맞벌이 비중은 2025년 하반기 기준 48.6%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자녀를 키우는 30·40대와 경제활동을 지속하는 60대 이상에게 똑같은 정책을 적용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에 재단은 ‘1인가구’, ‘맞벌이가구’처럼 가족 형태를 기준으로 지원 대상을 구분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연령과 생애주기, 실제 생활 여건을 함께 반영하는 방향으로 정책 연구와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자녀와 고령 부모를 동시에 책임져야 하는 ‘이중돌봄’도 새롭게 주목하고 있다. 경제적·신체적 부담에 더해 장기간 돌봄에서 발생하는 정서적 소진과 사회적 고립까지 정책 영역에서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필요한 정책 찾아 헤매지 않도록…‘정보 장벽’ 낮춘다
좋은 정책이 있어도 시민이 알지 못하거나 신청 과정이 복잡하면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 어렵다. 박 대표가 정책의 내용만큼 ‘접근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임신 준비부터 결혼, 출산, 양육까지 서울시와 자치구에 흩어져 있던 정보를 모은 ‘서울아이룸’은 시민이 자신의 상황에 맞는 정책을 찾고 실제 서비스 신청 단계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서울형 키즈카페와 우리동네키움센터 등 생활권 돌봄 인프라와 함께 ‘미래아이365’를 통해 지역별 놀이·교육 프로그램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동을 위한 정책은 시설 확충을 넘어 콘텐츠로 확대되고 있다. 재단은 수리력과 사회성, 창의력, 문제해결력 등을 놀이 과정에서 기를 수 있는 보드게임과 교육 콘텐츠를 개발해 어린이집 등에 보급하고 있다. 교사와 양육자, 아이돌보미가 아동의 발달 수준에 맞춰 활용할 수 있도록 교육 방법도 함께 제공한다.
폭력피해 지원에서도 정보의 문턱을 낮추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가정폭력과 성폭력, 스토킹, 디지털 성범죄 등에 대한 지원 정보를 통합해 피해자가 여러 기관을 찾아다니며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설명해야 하는 불편을 줄이는 것이 목표다.
향후에는 AI를 활용해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적절한 지원기관과 절차를 안내하는 체계로 발전시키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박 대표에게 기관장의 임기는 단순한 조직 관리 기간이 아니다. 개인이 가진 경험과 네트워크, 전문지식과 사업 역량을 조직의 자산으로 바꿔놓는 시간이라는 설명이다.
취임 이후 약 2년 동안 외부 기관과의 협력을 확대하고 새로운 기술을 현장에 접목한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예산과 인력의 한계를 새로운 사업을 하지 못하는 이유로 삼기보다 외부의 자원과 전문성을 활용해 정책 효과를 높이는 방식이다.
그가 말하는 혁신의 최종 목적지는 결국 시민이다.
박 대표는 “‘유리천장을 깨자’는 말보다 ‘유리천장을 함께 들어 올리자’는 표현을 좋아한다”며 “누군가는 계속 일할 수 있게 되고, 누군가는 돌봄 부담을 덜고, 또 누군가는 어려운 순간에 도움받을 곳이 있다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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