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지 4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은 우크라이나의 돈바스와 크림 지역에서 이어져 오던 ‘내전’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국제전쟁’으로 성격을 바꾼 분기점이기도 하다. 그날 이후 유럽의 전쟁은 다시 세계사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전쟁을 규정하는 언어는 여전히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다. 러시아는 지금도 이 전쟁을 국제전쟁으로 부르지 않는다. 공식 명칭은 여전히 ‘특별군사작전’이며, 러시아 정치인과 친정부 학자들은 우크라이나의 역사와 국가 정체성 자체를 부정한다. 그 연장선에서 돈바스 지역의 영토 할양을 요구하는 러시아의 태도는 국제규범보다는 내전의 논리를 닮아있다.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일부로 보는 서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반면 우크라이나의 인식은 분명하다. 이 전쟁은 주권과 영토를 침해당한 국제전쟁이며, 국제 규범의 문제다. 그래서 개전 직후부터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유럽연합(EU)을 향해 도움을 요청했고, 국제사회 역시 이를 받아들여 군사·경제적 지원을 이어왔다. 전쟁의 성격에 대한 인식 차이는 곧 개입의 정당성과 전쟁의 향방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이처럼 내전과 국제전쟁의 인식이 뒤섞이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역사상 가장 처참한 내전 중 하나였던 19세기 중반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이 그러했다. 1851년,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맞서 한족의 자립을 주장한 태평천국은 스스로를 독립된 정치 공동체로 규정하며 사실상의 국제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이를 반란으로 규정했고, 전쟁은 ‘내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전쟁의 성격은 하나였지만, 해석은 둘이었다. 태평천국 내전 역시 국제전쟁의 요소를 점점 흡수했다. 1858년부터 1860년까지 벌어진 제2차 아편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청나라를 공격하자, 태평천국에게는 예상치 못한 기회가 열렸다. 내전은 국제질서와 맞물리며 국제화되었다.

이 시기를 다룬 역사학자 스티븐 플랫의 ‘천국의 가을’은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영국에게 세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고 분석한다. 우선 미국 남북전쟁에서 경제와 문화적 연대가 깊었던 남부연합을 지원할 수 있었다. 동시에 청나라와는 불평등조약을 통해 개항 무역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태평천국은 기독교적 천년왕국이라는 이념으로 영국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런 가운데 영국의 선택은 청나라였다. 상하이에서는 영국인 찰스 조지 고든 장군이 이끄는 상승부대가 태평천국을 향해 총을 들었다. 그 선택의 결과는 분명했다. 미국에서는 남부연합이 패배했고, 중국에서는 태평천국이 멸망했다. 초강대국의 선택은 내전의 결말을 바꾸었다.

이러한 역사는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듯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 지원의 열쇠를 쥔 초강대국 미국 역시 복수의 선택지 앞에 서 있다. 미국에게는 이란과의 전쟁, 러시아와의 협력, 그리고 중국과의 대결이 동시에 얽혀 있다. 미국의 선택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국제전쟁으로 지속시킬 것인지, 아니면 러시아의 해석대로 ‘내전의 역사’로 봉합할 것인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개전 4주년을 넘긴 오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그 성격 역시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역사는 다시 한번 선택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김광진 숙명여대 석좌교수 한국안보전략·시스템학회장 전 공군대학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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