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만에 다시 외환이 문제다. 1997년 당시 외환보유액은 39억 달러로 바닥났지만, 현재는 4100억 달러(2025년 11월 기준)를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외환보유액의 절대 규모가 아니라 구조적 달러 수요 증가에 있다. 1997년 같은 위기까지는 아니지만 환율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자본이 해외 이탈하고 금리가 올라 경제 주체들의 이자 부담이 높아지는 악순환이다.
1997년과 달리 지금은 정부가 아닌 가계와 기업 부채비율이 높다. 최근 4대 은행 주택담보대출(혼합형) 금리 상단이 6%를 넘었다. 3년 만기 회사채 AA- 등급 금리는 3.5%에 근접했다. 환율은 무역이나 해외투자를 하는 이들뿐 아니라 금융을 이용하고 경제활동을 하는 모든 경제 주체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환율의 방향을 예측하기는 어렵다. 섣부른 예측보다는 환율에 영향을 미칠 다양한 변수들을 최대한 많이 살피는 게 현명한 접근이다. 그래야 환 변동성에 대응할 수 있는 선택을 조금이라도 미리 할 수 있다. 그런데 조금 걱정스럽다. 최근 외환 문제에 대응하는 정부와 중앙은행 등 당국자의 접근이 그리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최근 환율 상승에 대해 정부와 한국은행이 각각 대책과 진단을 내놨다. 외환 정책을 총괄하는 정부는 국민연금의 해외투자에 대해 환 헤지(hedge)를 하는 카드를 꺼냈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1일 “(원화 약세로) 여러분의 급여가 디스카운트되고 국민연금이 결과적으로 이 문제에 영향을 미친다는 부분을 논의할 시점이 왔다”면서 “해외로 나가야 했는데 국민연금이 환 시장에서 공룡이 됐다”고 말했다.
외환을 관리하는 한국은행 이창용 총재는 해외(미국) 주식 투자를 많이 하는 ‘유니크(unique) 한’ 국민 탓으로 돌렸다.
국민연금 환 헤지(?)…장기 투자는 언 헤지(un-hedge)가 정석
환 헤지는 장기 투자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게 정석이다. 비용만 들고 수익률에 도움이 되기도 어렵다. 통화 가치가 높은 나라의 경제가 좋기 마련이고 투자 수익률도 높을 확률이 높다. 그래서 환율 변동성이 장기적으로 상쇄되는 경향이 있다.
환 헤지는 통상 1년 단위로 갱신해야 한다. 국민연금이 1년 뒤 실제로 달러 자산을 매각한다면 거래는 여기서 끝이다. 하지만 장기 투자를 한다면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해야한다. 계속 수수료를 지출해야 한다. 환 헤지 비용은 일반 수수료에 한미 금리차까지 반영된다. 한국과 미국의 금리 역전 상황을 고려하면 현재 기준으로 연 2%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민연금 해외투자 규모를 감안하면 연간 수 조원 이상의 헤지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
국민연금 보험료 수입의 적자 전환, 즉 기금을 헐어 연금을 지급해야하는 시기는 2053년부터다. 그 전까지 해외투자 액수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헤지를 계속한다면 천문학적 비용이 나갈 수도 있다. 국민 부담이다. 물론 일부 환 헤지를 하는 대형 기금이나 펀드도 있다. 하지만 나라의 환율 관리가 아니라 투자 전략 차원에서의 선택이다. 국민연금도 투자전략에 따라 일부 환 헤지를 한다면 모르겠지만, 나라의 환 관리가 목적이라면 규모가 클 수록 효과도 커진다. 적게 하면 환율 개선 효과도 줄어든다.
한은 총재 “유니크 한 국민 탓”, 금감원장 “공룡 연금”…정책 판단의 결과인데
이른바 서학 개미의 해외투자 급증이 환율상승의 주범이라는 이 총재의 ‘유니크 한 국민’ 진단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누가 봐도 한국 보다 미국 주식의 수익률이 좋았다. 국민들의 미국 주식 투자는 합리적 판단의 결과다. 고위 공직자들조차 미국 증시에 투자해 큰 돈을 번 사례가 많다. 국민들이 유니크한 게 아니라 국내 증시의 상대적 매력이 낮았던 탓이 크다. 통화 정책 외 이슈에도 관심이 많은 이 총재가 이를 모를 리 없다. 통화신용정책과 물가 및 금융안정은 다른 이에게 돌리기 어려운 한은의 책무다.
최근 원화 약세의 배경으로 통화량(M2) 증가를 주목하는 이들이 많다. 원화가 많이 풀려 환율이 높아졌다는 접근이다. M2는 한은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주제다.
지난 윤석열 정부 때, 다시 말해 이창용 총재 취임 직후 M2가 크게 늘었다. 지난 정부는 빚을 내서 집을 사기 쉽게 하기 위해 주택관련 정책 대출을 엄청나게 늘렸다. 경기부양을 위해 금리도 내렸다. 그 결과 2022년 4월부터 올 9월까지 M2의 절반을 차지하는 가계(비영리단체 포함) 부문이 25.8%나 급증했다. 정부가 금융 및 통화정책으로 돈을 풀었지만 오히려 기업 투자는 크게 위축됐다. 투자의 마중 물이 될 재정정책이 펼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여유자금은 2023년 고금리 땐 은행예금으로, 2024년 이후엔 MMF·CMA 등 기타금융기관 상품으로 이동하며 떠돌았다.
환율도 많이 올랐다. 윤석열 정부 기간 원화 가치는 1256원에서 1427원으로 13.6% 떨어졌다. 그나마 500억 달러 넘게 외환보유고를 풀어 환율을 방어한 결과다. 이 기간 외환보유고는 4500억 달러에서 4000억 달러까지 떨어진다. 실질실효 환율은 98.69에서 85.8까지 추락한다. 13%나 가치가 하락한 것으로 일본(-11%) 보다 낙폭이 깊다. 원화 통화량 증가를 키운 정책이 환율 상승의 원인 중 하나임은 분명해 보인다.
진짜 원인은 높은 한국 자산 매력 낮춘 재정정책과 통화정책
원화 약세의 또다른 근본원인은 높은 달러 수요다. 안전자산인 미국 국채의 이자율은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 보다 훨씬 높다. 글로벌 혁신도 대부분 미국 증시에 반영된다. 글로벌 자금이 뉴욕으로 향할 수 밖에 없다. 국민연금이나 서학 개미의 미국 투자를 비판하기 어렵다. 국내 자산의 상대적 매력이 미국 보다 못했던 탓을 하는 게 바람직한 접근이다.
경제 상황이 좋은 나라의 통화가치가 높아지는 게 환율의 정석이다. 윤석열 정부는 재정건전성을 이유로 소극적 재정정책을 펼쳤다. 반면 한은은 경기와 가계부채를 고려해 완화적 통화정책을 전개했다. 같은 기간 미국이 긴축적 통화정책과 확장적 재정정책을 펼친 것과 반대다. 그 결과 한은은 기준금리를 미국 보다 덜 올렸고 미국과의 금리차가 유로존보다 더 큰 상태를 상당기간 유지했다.
과연 윤석열 정부와 이창용 총재가 잘 한 것일까? 2023년부터 2025년까지 경제성장률은 한국이 2.6%, 1.36%, 1.0%(예상), 미국이 2.89%, 2.8%, 2.1%(예상)이다.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2%인 데 반해 미국은 1.8% 수준이다. 잠재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으니 결코 잘했다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 환율은 펀더멘털을 반영한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상법 개정으로 지배구조 개선 기대가 커지며 코스피 4000시대가 열렸다. 그런데 외국인들은 올 들어 1일까지 한국 주식을 10조원 이상 순매도했다. 국채 선물 시장에서도 지표 격인 10년 만기 물만 10조원 이상을 팔았다. 주식시장이 급등할 때 채권시장이 폭락한 원인은 환율과 금리다.
지배구조 개선에 따른 코리아디스카운트 해소로 증시는 올랐지만 외국인들은 코스피 3800선부터 ‘팔자’로 돌아서며 개인과 기관에 물량을 넘겼다. 환율이 1480원까지 치솟던 11월에만 무려 14조원 넘게 순매도했다. 채권시장에서도 트럼프 관세가 전세계를 강타한 직후인 5월부터 선물 순매도를 쏟아냈다.그 결과 4월말 2.56%이던 국고채 10년 물 금리는 이달 1일 3.87%까지 치솟았다.
우리 증시가 올해 많이 상승한 것은 경제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 동안의 할인이 해소된 덕분이 크다. 많이 올랐지만 12개월 선행 코스피 주가수익비율(PER)은 아직 약 12배다. 주요 선진국 대비 그리 높지 않다. 채권 금리 급등은 우리 경제의 상대적 펀더멘털이 탄탄하지 않음을 반영한다. 심지어 지난 달 말 한은은 환율과 가계부채 부담으로 기준금리 인하 기조를 사실상 포기했다.
외국인들은 원화 가치 하락 국면에서 주식의 경우 차익실현을 위해, 채권의 경우 추가 손실을 막기 위해 매도로 대응한 것으로 풀이된다.
트럼프가 강제한 대미 투자…기업들의 ‘달러 블랙홀’로
국민연금과 서학개미 외에 또다른 달러의 ‘블랙 홀’은 대미 기업 투자다. 바이든 정부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으로 우리기업의 투자를 유인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를 무기로 우리 기업의 대미 투자를 강제하고 있다. 기업들 입장에서는 긴 호흡으로 달러 마련을 고민할 수 밖에 없다. 최근에는 미국에 3500억 달러 투자까지 약속했다. 이재명 정부는 매년 투자액을 200억 달러로 제한했다고 강조하지만 상당한 신규 수요이고 기간도 길다. 우리 경제 규모로는 큰 부담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계속 달러가 필요한데 굳이 수출대금을 원화로 바꿀 이유는 적다.
글로벌 경제 흐름을 봐도 짧은 시간 내에 원화 가치가 높아질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달러 가치는 미국의 재정정책과 통화정책과 함께 유로나 엔 등 다른 주요국 통화들에 의해결정된다. 미국도 재정 확장과 완화적 통화정책이 예상되지만 유럽과 일본, 심지어 중국 역시 마찬가지다. 얼핏 다들 비슷한 듯 보이지만 경제 펀더멘털이 더 강한 쪽의 통화가치가 상대적 강세를 보이기 마련이다. 누가 봐도 미국이 유럽과 일본, 중국 보다 경제 펀더멘털이 강하다. 금리도 미국이 더 높다.
실제 최근 기업들의 선택은 달러 강세 대비다. 이는 최근 외화예금 증가율이 가파른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2022년 4월부터 올 9월까지 예금잔액 증가율은 원화가 15.8%, 외화가 32.4%다. 해외 금융회사에 맡긴 기업들의 외화 규모는 파악이 어렵다. 미국 예금 이자나 시장형금융상품 수익률은 한국 보다 높다. 국내 외화예금 보다 훨씬 많은 기업 자금이 해외에 머물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원/달러 환율 방향성은 우상향…방향 바꾸려면
달러가 해외로 나갈 이유들은 수두룩한데, 국내로 들어올 경로는 수출 밖에 없다. 구조적인 달러 부족이다. 일본 엔화는 원화보다 가치가 더 떨어졌다. 금융위기 때는 원화 실질실효환율이 엔화보다 낮았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로 엔화 실효환율이 더 낮다. 일본 제품의 수출 경쟁력이 원화 보다 강하다는 뜻이다. 공산품 기술 수준이 상당히 개선된 중국은 생산과잉으로 밀어내기 수출 중이다. 단기간에 우리 수출이 크게 늘기 쉽지 않다.
국내로의 달러 유입을 늘려 환율을 안정시키려면 외국인들의 투자를 늘려야 한다. 제조업 경쟁력은 이미 중국에 밀리기 시작했다. 미-중 대결 국면에서 상대적으로 경쟁우위에 설 수 있는 분야의 투자 유치가 중요하다. 인공지능(AI)과 데이터센터가 대표적이다. 발전과 송배전망, 용수 등의 AI 인프라를 갖춰야 한다. 정부와 기업이 함께 노력해야 가능하다.
국민들의 미국 증시 투자 쏠림을 줄이려면 ‘유니크’ 한 한국 증시 상황부터 바뀌어야 한다. 주주 친화적 지배구조 개선이 제대로 실천되어야 한다. 미국에 반강제로 투자한 우리 기업들은 대부분이 국가 대표급들이다. 이들이 영리한 투자로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어야 한다.
수출은 막대한 고정비가 필요한 제조업 기반이 아니라 설비투자 부담이 적은 소프트웨어와 콘텐츠 기반의 경쟁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 이른바 ‘K-프로덕트’다. ‘미장(美場)’ 보다 ‘국장(國場)’ 매력이 더 커져 해외 투자자들에게 ‘K-투자’ 열풍까지 일어난다면 달러 수요 우위에 쏠린 상황은 개선될 수 있다.
정부도 원화 국제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미국과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맺지 못한 것은 기축통화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축통화는 언제 어디서든 외환거래가 가능한 통화다. 우리나라의 글로벌 무역규모를 감안한다면 꼭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외환 정책 담당자들은 아직도 1997년의 트라우마(trauma)에 사로잡혀 자본 이동 자유화에 대해 소극적인 듯하다. 한국은 중국 다음으로 많은 나라들과 통화스와프를 맺고 있으며, 역외선물환(NDF, 해외에서 거래되는 원화 선물환) 시장에서의 원화 거래량은 현물환 시장보다 규모가 크다. 충분한 국제 수요가 존재하는 만큼 글로벌 수준으로 제도를 정비하며 기축통화가 될 가능성이 있다.
경기 조절을 위해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을 과용하는 관행도 재고되어야 한다. 통화정책은 자산시장에 먼저 영향을 미처 양극화를 초래할 위험이 크다. 투자 유발을 통한 직접적인 경기 부양에는 재정 투입이 오히려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국민연금기금 관리 ‘고갈’ 전제 보다 ‘유지’ 모색으로 접근해야
국민연금이 논란이 될 때마다 등장하는 게 ‘고갈’ 시점이다. 보험료로 연금 재원을 충당하지 못하게 되면 기금을 헐어서 쓴다는 전제다. 헐어서 쓰기시작하면 고갈은 시간문제다. 기금이 고갈되면 선택은 두 가지다. 국민들이 엄청나게 높은 보험료를 감당하거나 재정으로 충당하는 방법이다. 사실 영국, 독일, 프랑스의 연금 위기도 일찌감치 기금이 고갈된 결과다.
일단 현재 국민연금은 향후 보험료 수입 적자 전환 시 기금의 보유 자산을 팔아 연금 재원을 마련하는 접근을 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해외투자 비중을 늘리는 이유는 포트폴리오 다변화 외에도 유동성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다. 국내 증시 비중이 크면 향후 자산 매각 시 유동성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 만약 기금을 헐어서 연금을 지급하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면 해외 비중을 줄이고 국내 비중은 좀 더 늘릴 수 있다. 달리 말해 기금 투자로 인한 환 변동성을 줄일 수 있다는 뜻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연금인 401K는 운용자산의 약 47%(2024년 기준)이 미국 주식이다.
인구 감소로 인해 기금의 보험료 적자 도래는 막기 어렵다. 기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예방적으로 연금 재원에 재정을 투입하는 방법을 가장 먼저 고려할 만하다. 세금은 누진적이어서 소득 분배 효과도 있고 연금과 달리 납입 연령 제한도 없다. 세대 간 형평성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 기금과 재정, 가입자가 연금 부담을 나눠진다면 제도는 더 오래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환율 안정은 단순히 외환시장 개입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국내 자산의 매력을 높이는 산업 정책, 적절한 통화·재정 정책 조합, 그리고 원화 국제화를 향한 장기 전략이 함께 가야 한다. 외환위기 때에도 외환관리 책임을 진 경제 관료들은 ‘펀더멘털이 튼튼하다’며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다. 국민연금 환 헤지나 ‘유니크 한 국민’ 탓으로 문제를 축소하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외환 위기의 씨앗을 키우게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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