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개최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APEC) 정상회의가 1일 폐막했다. 일주일간의 화려한 국제행사로 이어진 ‘외교 슈퍼주간’도 성대하게 끝났다. 1989년 탄생한 APEC 회원은 국가가 아닌 경제단위체(Economies) 개념으로 참가한다. 정상회의의 명칭도 ‘경제지도자회의’(Economic Leaders’ Meeting)이다. 1991년 중국과 대만, 홍콩의 동시가입을 유도한 한국이 중재한 결과다. 냉전종식 시대의 한 상징이었다.
그런 APEC도 지역협력체의 명운을 다하는 것 같다. 경주 정상회의의 공동성명에서 ‘자유무역 원칙’이라는 문구가 빠진 것은 이례적이다. ‘자유무역 원칙’을 포함하는 데 미국이 반대하고 오히려 중국이 자유무역을 강조하는 것은 더 기괴하다. 그것은 다자간 자유무역체제가 이미 끝났다는 의미다. 사실 UN과 세계무역기구(WTO) 등 다자간 협력체의 기능은 이미 약화됐다. 참가국간 양자회담 장을 제공하는 정도의 역할만 남았다. APEC 정상회의도 예외는 아니다. 더구나 미국과 중국, 러시아는 서로 적대하고, 중국이 무력침공을 위협하는 대만도 회원인 조건에서 APEC의 집단적 협력은 더욱 어렵게 됐다. 경주 APEC 폐막식에서 내년도 주최국인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이 정상회의를 ‘비정식회의’라고 지칭한 것은 국가 간 협력체가 아님을 환기시킨 것이다. 대만을 의식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정상회의 개막식을 보지도 않고 한국을 떴다. 내년 회의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참석할지도 불투명하니 중국만의 잔치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주최국의 이익은 최대한 추린 셈이다. 다만 경주 APEC 정상회의의 성공이라기보다는 ‘경주 APEC 정상회의 외교’가 성공적이었다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한 평가일 것이다. 이번 정상회의는 그 자체보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의 국빈방한 등 이재명 대통령의 정상외교와 미중 정상회담,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회동 가능성이 더 크게 부각됐다.
또 장외에서 엔비디아를 비롯한 세계 유수의 인공지능(AI) 기업과 한국기업 총수들이 회동하는 등 민간 비지니스 활동이 전세계의 관심을 모았다. 한국은 APEC 정상회의 주최 기회를 활용해 개최지인 경주와 K-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새 정부 출범 초기 외교를 총결산하는 외교적 성과를 챙겼으니 ‘APEC 정상회의 외교’는 성공적이라고 할만하다.
APEC 정상회의를 통해 자유무역체제와 지역협력이 한물갔다는 것이 확인됐다. 그렇지만 더 큰 통찰이 필요하다. 한국으로서는 각자도생하는 불확실한 조건보다는 예측가능한 규범이 있는 조건이 더 유리하다. 사실 새로운 국제무역규범의 이원화는 이미 시작됐다. 사이버안보나 AI 규범에 관한 국제적인 논의에서 중국은 사실상 자의반타의반 배제되고 있다. 미국은 우호적인(like-minded) 국가들만의 안전하고 안정적인 공급망 체계를 구축하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 이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국의 전략에 대응하면서도 예측가능한 새로운 국제무역규범 논의를 유도하고, 동시에 중국 등 주요국과 양자 간 무역규칙도 정비하는 것이 ‘실용외교’의 금후 과제다.
이현주 전 외교부 국제안보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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