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 여유가 있을 때 평소 드라마를 즐겨보는 편이다. 탄탄한 각본과 배우들의 명 연기를 통해 바라보는 또 다른 가공의 세상은 반복되는 삶의 답답함을 풀어주는 청량제다. 대선과 정치 이슈가 뉴스를 도배하는 요즘엔 지난해 나왔던 ‘돌풍’ 드라마가 떠오른다. 이 드라마의 묘미는 연이은 반전이었다. 대권을 향하는 두 정치인의 대립은 매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이른바 현실이라면 ‘정치생명이 끝났다’고 평가될 상황에서도 작가는 이야기를 상상도 못할 설정으로 뒤엎는다. 매우 흥미롭게 본 드라마였다.
이 작가의 탁월한 상상력도 이제는 긴장해야 할 것 같다. 지난 반년간 흘러온 대한민국의 정치와 사회 현상은 가히 ‘각본 없는 드라마’라 표현해도 부족하지 않아서다. 아니 드라마의 상상력을 뛰어넘었다고 감히 자부한다. 반전의 기준은 상식이다. 통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고의 범위를 넘어설 때 우리는 생각지 못한 전개에 찬사를 보낸다. 드라마 보다 더 드라마틱 했던 현실 속 반전의 장면을 마치 하나의 작품처럼 구성해 봤다.
시작은 12.3 비상계엄이다. 밤 10시 30분. 대통령의 긴급 담화 소식에 모두가 술렁인다. 야당의 예산안 감액 처리 등에 대한 메시지가 나올 것으로 예상됐다. 설마 비상계엄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의 음성이 전해진다. 시대 설정이 마치 반공 시대로 돌아간 것 같았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현실판 드라마의 시작이었다.
이어진 현직 대통령의 체포 현장. 법원에 의해 발부된 영장에 국가 최고의 리더는 새해 벽두부터 지지자들을 향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한남동은 둘로 쪼개져 그야말로 난장판이 됐다.
초유의 현직 대통령 체포의 각본 없는 드라마는 이어, 구속에서 절정에 달하고, 서부지법 난동사태라는 역대급 장면을 낳는다. 이 또한 감히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시나리오다.
그러더니 이어선 구속이 취소돼 구치소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쥔 대통령의 모습을 TV에서 볼 수 있었고, 사상 두 번째 대통령 탄핵의 역사를 남겼다.
여기까지가 계엄 이후의 드라마라면 대선의 드라마도 역대급 반전의 각본을 써내려 간다. 이재명 후보에 대한 1심의 유죄를 뒤집는 고법의 무죄 판결과 대법원의 유죄취지 파기환송은 감히 누구도 상상해 보지 못한 장면이었다. 대법관에 대한 탄핵과 특검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초유의 일이다.
국민의 힘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도 김문수 후보와 한덕수 전 총리의 막판 단일화 전쟁은 ‘막장 드라마’의 끝판왕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심야 1시간 후보 접수의 무리수와 사전에 짜여진 각본을 산산조각낸 당원 투표 결과는 반전에 반전을 연출한 또 하나의 드라마였다. 이렇게 쭉 재구성해 보니 진심으로 극적 요소와 반전을 두루 갖춘 최고의 드라마였다는 데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 같다.
흔히 경제는 불확실성을 극도로 싫어한다고 했다. 하지만 어디 경제뿐이랴.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긴장하는 현실은 불안 그 자체다. 대선이 이제 불과 12일 남았다. 현실 드라마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새 지도자는 무엇보다 예측 가능한 일상을 국민들에게 선사하길 간절히 바란다. 무미건조한 일상이 지금은 너무나 그립다.
정순식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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