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년 연기 활동’ 배우 이혜영
액션·드라마 함께한 ‘파과’ 주연
60대 女킬러 역할…액션도 소화
“안 맞춰준 감독은 민규동이 처음
쓸모있는 배우로 살아남으려 노력”

“‘여성의 서사’에 특별히 집착해본 적이 없어요. 물론 제가 배우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모든 ‘여배우’의 존재는 남자배우의 상대로서만 가능했죠. 그래서 멜로에 적합하지 않은 여배우는 밀려났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독립적이고, 남성의 상대역으로서 존재가 아니어도 여배우가 할 만한 롤이 많아졌습니다. 한국만 그런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래요.”
독보적 카리스마의 배우 이혜영이 주인공 조각(爪角·짐승의 발톱이란 뜻)으로 영화 ‘파과’를 이끈다. 지난달 30일 개봉한 영화 ‘파과’는 레전드 킬러로 불리는 60대 여성 노인 조각과 30대 젊은 혈기의 실력자 킬러 투우(김성철 분)가 20여 년 전 지독한 인연으로 얽히면서 현재에까지 이르러 서로를 향해 칼날을 겨누는 이야기다. 구병모 작가의 소설 ‘파과’를 원작으로 ‘간신’ ‘허스토리’ 등을 연출한 민규동 감독이 각색·연출했다.
신체의 모든 기운이 쇠해지기 시작하는 60대 중반의 여성 노인이 30대의 건강한 남성과도 대등하게, 심지어 우월하게 겨루고, 1대 다수로도 대적할 수 있다는 ‘거짓말’ 같은 설정은 이 이야기가 영화화되는 것을 오랜시간 저지해왔다.
하지만 민 감독은 이혜영을 만난 순간 “마치 평생을 ‘조각’을 하기 위해 기다리신 게 아닐까 생각했다”고 밝혔다. 정말로 ‘파과’ 속 이혜영의 액션은 ‘가짜’ 같아 보이지 않았다. 대표적 연기파 여배우인 그가 여전히 자신의 ‘쓸모’를 입증해낸 것이다.
![60대인 배우 이혜영은 영화 ‘파과’에서 거의 모든 액션을 직접 소화했다. [NEW·수필름 제공]](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5/01/news-p.v1.20250430.36c2d675667c472282c3aead542010f7_P1.png)
‘파과’ 개봉을 앞두고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혜영은 “나는 상대역이 없는, 강하고 독립적 이미지를 가진 여배우 중 하나였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취향을 만족시켰고, 또 지금까지 내가 살아남은 것 같다”고 밝혔다.
쉬운 배역 대신 언제나 도전을 택했던 그였지만, 조각 만큼은 몇번이고 두려워 고사했다고 털어놨다. “소설을 먼저 봤어요. 남들에게 전설로 불리게 된, 남들이 그렇게 믿게 된 그녀의 수수께끼같은 힘이 뭘까, 그 원천은 뭘까, 그런것들이 궁금했고 매력이었죠. 하지만 과연 영화가 될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킬러 얘기는 비현실적이라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조각도 그려지는 이미지 자체가 없었어요. 너무 두려웠고, 촬영에 들어가고 나서도 내내 불안했어요.”
민 감독과 작업은 때로 힘에 부치고, 현장에서 불평도 표출했다는 이혜영은 결과적으로 나온 작품을 보고는 “‘역시 다 생각이 있으셨구나’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전작을 홍상수 감독 작품으로 했던터라 (여유로운 촬영 방식과 반대인) 민 감독님의 촬영 방식이 낯설고 굉장히 타이트하게 느껴졌다”며 “강철처럼 완벽한 콘티를 바탕으로 정해진 프레임 안에서 기술적으로 연기하면서 감정은 절제해야 된다는 (민 감독의) 주문은 정말 쉽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파과’의 표피는 복수와 화해의 이야기란 모양새를 취하지만, 속내를 파보면 ‘인간의 쓸모’에 관한 이야기다. 늙고 쇠약해진 존재의 쓸모를 증명하는 주인공이 바로 조각이다. 조각을 의도적으로 도발하는 투우가 과일가게에서 떨이로 얹어주는 파과(흠집나고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과일)를 조각의 발치에 던지고 발로 무자비하게 으깨버리는 장면에서, 조각은 아마 자기 자신이 짖이겨지는 것과 같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혜영은 “‘쓸모’ 보다는 오히려 ‘쓸모없음’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깊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영어로 ‘유즈리스(uselss)’라고 하죠. 촬영 내내 ‘쓸모없다’는 단어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그리고 그 생각이 어디까지 이어졌냐면, ‘내가 쓸모있는 배우로 살아남으려면 민 감독님의 프로세스에 익숙해져야겠지’였죠.”
그는 인터뷰에서 민 감독과 작업이 얼마나 신선했는지를 여러 번 강조했다. 그중 압권은 “나에게 맞춰주지 않은 감독은 민 감독이 처음”이라는, 하이틴 로맨스 속 남자 주인공의 대사같은 발언이었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는 제가 연기를 제 맘대로 했더라고요. 제 감정이 올라올 때까지 상대 배우가 기다려준다거나, 모든 연출진이 저한테 많이 봐준 거 같아요. 현장에 가면 미리 세팅이 다 돼 있고, 저는 늦게 나타나서도 막 의견내면서 현장을 바꿨습니다. 여태까지 감독들이 그걸 다 들어줬어요. 심지어는 ‘저 벽을 뜯으세요’ 그러면 그것도 맞춰줬죠. 근데 민 감독님은 그게 아니었어요(웃음). ‘이거 콘티 안 읽어보셨어요’라고 물으면서, ‘이거 100명이 이렇게 하기로 약속했는데 안 보시고 나오면 어떡해요’ 이러시더라고. 완전히 다른 세계인 거죠.”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액션 신들을 소화하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촬영이 다가왔다. 데뷔 40년(1981년 데뷔)이 넘은 그는 주저앉아 울고야 말았다고 한다.
“‘끝났다고? 왜? 왜 끝나는거야?’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보상을 받고싶더라고요. ‘그냥 끝내버리지 말아줘’ ‘이렇게 끝낼 수 없어’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혜영 개인에게는 ‘미완’으로 남은 상태로 촬영이 끝났다는 것이다. 불안한 마음속에서 영화는 후반 편집 단계로 진행됐다. 그러던 그의 마음이 완전히 풀어진 것은 지난 2월 베를린국제영화제부터다. 이혜영은 “그때 관객들이 꽉 차서 우리 영화 ‘파과’를 봤는데, 한국어 대사에 자막으로 이해해야 함에도 외국인들이 너무 재밌게 보고 환호도 나왔다”고 떠올렸다. 이어 “거기서 제가 비로소 안심을 했던 것 같다. 평이 좋아서 기세등등하게 귀국했다. 감독님이 다 계획이 있으셨던 거구나 싶었다”고 덧붙였다.
베를린에서 가져온 자신감과 여유는 지난달 27일 제작발표회로 이어졌다. 질의응답 내내 여유있으면서 센스있는 답변에 이어 포토타임에서는 숨길 수 없는 익살스러움과 끼를 대방출 했다. 카리스마있고 때로는 무섭기까지 했던 그의 작품 속 이미지들과 배치되는 모습은 많은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줬다.
이혜영은 “작품을 할 만큼 많이 했다. 오래 살기도 했다. 그간 저한테서 이런 모습을 못 보셨다면 그건 아마 대중들이 나한테 관심을 가질 시간이 없으셨던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동안 저는 계속 여러가지를 해왔다. 사실 지금 너무 기회를 갖지 못하는 배우들이 많다. 그거에 비하면 저는 아주 대성공을 한 배우”라고 강조했다.
이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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