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필리핀 보홀주 바타산(Batasan)섬이 슈퍼태풍 라이로 파괴된 모습.[그린피스 제공]](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4/29/news-p.v1.20250429.adb28977e7be45bf923d87c7180482d0_P1.jpeg)
[헤럴드경제=김광우 기자] “이대로 죽을 거면, 같이 죽자”
#.2021년 12월 16일. 강력한 바람은 지붕을 날렸고, 그 사이로 폭우가 쏟아졌다. 성난 파도까지 들이치자, 콘크리트 건물도 무용지물이었다. 젖은 가구를 살필 여유는 없었다. 무릎까지 바닷물이 차올랐다. 평생 먹거리를 내주며 가족을 먹여 살린 바다, 대자연은 한순간 ‘포식자’로 돌변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도망칠 자신이 없었다. 관절염을 오래 앓은 아버지는 거동이 힘든 상태였다. 함께 죽겠구나. 가족들의 손을 맞잡고 생각했다. 순간 허리까지 차오른 바닷물이 차갑게 느껴졌다.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가족들은 서로를 붙들어 맨 채 헤엄치기 시작했다.
![2021년 필리핀에 슈퍼태풍 라이가 상륙한 가운데, 주민들이 수영해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고 있다.[유튜브 nowthisimpact 채널 갈무리]](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4/29/news-p.v1.20250429.a77461c8249549a3bff70ade457d0f43_P1.png)
당도한 곳은 미리 피난을 떠난 이웃집의 2층. 간신히 건물에 발을 디뎠다. 가족들은 머리 위 지붕을 위안 삼아 비바람을 버텨냈다. 곧 태풍이 잦아들었지만, 안도하기는 일렀다. 어렵사리 다시 찾은 집에는 쌀은커녕, 입을 옷 한 벌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마을은 외딴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방정부의 지원은 깜깜무소식이었다. 그 와중에 아버지는 재난 후유증으로 심근경색 증상을 호소했다. 어머니는 대피하던 와중 발을 크게 다쳤다. 현장을 떠날 수 없는 처지, 태풍에 휩쓸려 죽을 동물들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버티는 것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태풍이 지나간 지 어언 4년 반이 흘렀다. 하지만 평화롭던 마을의 풍경은 쉽게 재현되지 않고 있다. 복구 작업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애정을 다해 가꾼 정원은 다시 만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의 이름(Nits)에다 ‘낙원’이라는 의미의 ‘파라이소(Paraiso)’를 더해 ‘아버지의 낙원’이라고 작명한 공간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또 다른 재난이 닥치고 있다는 것. 최근 들어 ‘해수면 상승’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며, 섬 전체가 물에 잠기고 있다. 만조와 밤이 겹치는 날이면, 바닷물이 집안까지 밀려온다. 파도가 집 외벽을 두드리는 소리는 태풍의 끔찍한 기억을 소환한다. 그렇게 쉽게 잠을 이룰 수 없는 날들이 잦아지고 있다.
필리핀 보홀주 바타산(Batasan)섬에 거주하는 두 아이의 어머니 트릭시 수마바 엘(35) 씨의 사연을 재구성한 이야기다. 그는 2021년 필리핀에 몰아닥친 ‘죽음의 슈퍼태풍’ 라이(Rai)의 피해자이자,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의 피해자다.
‘기후변화’로 잃어버린 삶…“피해자 더 없어야”
![2021년 12월 필리핀을 강타한 슈퍼태풍 라이의 피해자 트릭시 수마바 엘(35) 씨가 서울 중구 정동에서 열린 ‘전략적 기후 소송에 관한 글로벌 워크숍’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그린피스 제공]](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4/29/news-p.v1.20250429.9e79e971d8e248b4b6aa4f4be4915497_P1.jpg)
트릭시 씨는 지난 14일 오후 국제 환경단체 그린피스가 서울 중구 정동에서 주최한 ‘전략적 기후 소송에 관한 글로벌 워크숍’에 참석해 이같은 내용의 기후재난 피해 사례를 발표했다.
이날 마이크를 잡은 트릭시 씨는 자신을 ‘기후위기의 최전선에 있는 당사자’라고 소개하며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이내 태풍 피해 당일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당시의 고통이 떠오르는 듯 연신 눈물을 훔쳤다. 한동안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힘겹게 이야기를 마친 트릭시 씨는 “슈퍼태풍 라이와 해수면 상승 모두 기후변화로 인한 결과라고 확신한다”며 “기후위기의 최전선에 서 있는 섬 주민들은 가장 큰 피해를 겪고 있지만, 유일한 터전이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2021년 12월 필리핀을 강타한 슈퍼태풍 라이의 피해자 트릭시 수마바 엘(35) 씨가 서울 중구 정동에서 열린 ‘전략적 기후 소송에 관한 글로벌 워크숍’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그린피스 제공]](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4/29/news-p.v1.20250429.a33daf392a174609985b3f2d7f357a6b_P1.jpg)
실제 2021년 12월에 필리핀을 강타한 ‘슈퍼태풍(5등급)’ 라이는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 즉 ‘기후재난’으로 여겨진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해수 온도가 높아진 것이 태풍 라이가 비정상적으로 강력해진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기 때문.
필리핀 주변 서태평양은 6월에서 10월까지가 전형적인 태풍 시기로 분류된다. 12월은 통상적으로 태풍 발생이 드물고, 발생하더라도 약한 강도를 보인다. 하지만 라이의 중심 최대 풍속은 259km/h로, 5등급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강도를 기록했다. 필리핀 정부 또한 국가재난위원회(NDRRMC) 보고서를 통해 태풍 라이를 “매우 이례적으로 강력한 태풍”이라고 규정했다.
![2021년 필리핀 보홀주 바타산(Batasan)섬이 슈퍼태풍 라이로 파괴된 모습.[그린피스 제공]](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4/29/news-p.v1.20250429.869f5276375649dc81337c861c143eb0_P1.jpeg)
지구온난화로 태풍 피해가 늘어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경고는 이어지고 있다. 세계기상기구(WMO)는 2021년 세계 기후상태 보고서를 통해 해수온 상승과 극단적 열대성 저기압 발생 증가가 직접 연결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라이가 상륙한 2021년 12월, 서태평양 해역의 해수면 온도는 예년 평균에 비해 0.5도 이상 높았던 것으로 집계됐다.
이에 따른 피해는 필리핀 등 일부 국가에 집중된다. 세계위험지수(World Risk Report)에 따르면 필리핀은 2024년 기준 전 세계 193개국 중 재해 위험이 가장 큰 국가로 선정됐다. 지난해 10월에는 한 달간 6개의 태풍이 연달아 발생하는 등 재난 발생이 더 빈번해지고 있다. 필리핀의 탄소배출량 순위가 전세계 30위권에 위치한 것을 고려하면, 기후변화를 유발한 요인에 비해 더 큰 피해를 받고 있는 셈이다.
![2021년 필리핀 보홀주 바타산(Batasan)섬의 한 집이 해수면 상승으로 물에 잠긴 모습.[그린피스 제공]](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4/29/news-p.v1.20250429.030617c37e7e460ea2da910f03794733_P1.png)
해수면 상승의 경우 지구온난화와 더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진다. 온도가 상승해 빙하와 만년설이 녹으면, 바닷물의 양은 늘어난다. 아울러 해수면 온도가 높아지면 바닷물의 부피도 팽창한다. 특히 필리핀은 따뜻한 바닷물이 몰리는 태평양 서쪽 가장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이에 해수면 상승이 전 세계 평균보다 3배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트릭시 씨는 2024년 필리핀 그린피스 활동가들이 섬을 방문한 이후, 자신이 겪은 재난이 기후변화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마을 공동체와 함께 기후변화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확대하는 데 힘쓰기로 결심했다. 현재는 그린피스와 함께 정부와 기업의 탄소배출 감축을 요구하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저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세대가 이 아름다운 섬의 자연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관련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며 “모두가 평등하고, 안전하며, 지속 가능한 환경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2021년 필리핀 보홀주 바타산(Batasan)섬이 슈퍼태풍 라이로 파괴된 모습.[그린피스 제공]](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4/29/news-p.v1.20250429.c04299ca8fda47c19344d25efe54f503_P1.jpeg)
한편 지난 2013년 필리핀에 또 다른 슈퍼태풍 욜란다가 강타하며, 1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이후 그린피스와 32개 시민단체 및 일반 필리핀 시민들은 지난 2015년 국가인권위원회(CHR)에 기후변화 관련 인권침해 진정서를 제출했다. 여기에는 셰브런, 엑손모빌 등 화석연료 기업들이 온실가스 배출로 기후변화를 초래해 필리핀 국민의 생명권·건강권 등을 침해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지난 2022년 7년간 법적 절차 끝에 최종 결과가 발표됐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기후변화가 인권을 침해한 사실을 인정했으며, 기업과 정부에 책임을 묻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는 국가인권기구가 기후변화와 인권침해 간 연관성을 공식 인정한 세계 최초의 사례로 기록됐다.

woo@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