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치츠키 문화장관, EU와 비공식 회의에서 밝혀

“러시아가 의도적으로 파괴”…헤이그 협약 위반

문화유산 대량 약탈 이후 텅 빈 헤르손 미술관 수장고 전경. [게티이미지]
문화유산 대량 약탈 이후 텅 빈 헤르손 미술관 수장고 전경. [게티이미지]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그 나라의 문화유산 170만여 점을 약탈해 암시장에 판매했다고 우크라이나 정부가 폭로해 충격에 휩싸였다. 이는 러시아가 국가의 정체성이 담긴 예술품까지 약탈해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하위 문화권으로 편입시키려는 전략적인 의도로 풀이된다.

18일 우크라이나 국영통신사 우크린폼(Ukrinform)에 따르면, 미콜라 토치츠키 우크라이나 문화전략통신부 장관은 지난 7~8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유럽연합(EU) 문화장관 비공식 회의에서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영국 등의 정부 관계자들과 만나 러시아가 점령지에서 가져간 유물들이 국제 암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상황을 공유했다.

토치츠키 장관은 이 자리에서 “러시아는 단지 영토를 점령하고 민간인을 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크라이나의 문화유산을 체계적이고 의도적으로 파괴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 그는 “점령지에서 약탈당한 문화유산은 고고학 유물부터 박물관 소장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총 170만 점에 달한다”며 “이는 국제법의 모든 기준을 위반하는 행위”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우크라이나 측 주장이 사실일 경우 러시아는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만들어진 무력 충돌 시 문화유산 보호 협약인 1954년 헤이그 협약 위반으로 간주한다.

헤르손 미술관 전시장에 진열된 문화유산이 대거 약탈당한 모습. [게티이미지]
헤르손 미술관 전시장에 진열된 문화유산이 대거 약탈당한 모습. [게티이미지]
문화유산 대량 약탈 이후 텅 빈 헤르손 미술관 수장고 전경. [게티이미지]
문화유산 대량 약탈 이후 텅 빈 헤르손 미술관 수장고 전경. [게티이미지]

실제로 유네스코(UNESCO)는 지난 15일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훼손된 문화유산이 최소 485건에 이른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종교 유적지가 149곳, 박물관이 33곳, 고고학 유적이 2곳 등이 포함돼 있다. 유네스코는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1200건이 넘는 문화유산 및 문화 인프라 훼손 사례를 공식적으로 문서화했다고 전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측이 주장하는 문화유산 약탈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당국은 러시아가 약탈한 작품들을 자국 내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지난해 9월 러시아 국영방송에서는 크림반도 타브리다 중앙박물관에서 촬영된 선전 영상이 방영됐는데, 이 영상에서 확인된 작품 100점이 헤르손 미술관 소장품으로 파악됐기 때문이다.

헤르손 미술관은 종교화부터 현대미술까지 1만4000점의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게 미술관 측 설명이다. 헤르손 미술관장은 “미술 전문가들이 그림을 살피고 지시를 내리면 러시아 군인들이 그림을 포장해 나르는 작업이 나흘간 계속됐다”고 말했다.

헤르손 미술관의 전시장 유리가 박살나 있는 모습. [AFP/연합]
헤르손 미술관의 전시장 유리가 박살나 있는 모습. [AFP/연합]

토치츠키 장관은 “국제 사회의 협조 덕분에 일부 유물은 반환되고 있다”며 “국가수반의 해외 방문이나 나의 외교 일정 중, 현지 당국이 점령지에서 약탈당해 해외로 밀반출된 유물들을 우리에게 돌려준 사례가 여럿 있었다”고 설명했다.

한편 미국은 최근 러시아와의 외교 노선을 재조정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2월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러시아-우크라이나 간 평화 협정을 중재하려 했으나, 이 회의에는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유럽 주요국 인사는 배제됐다. 같은 시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3주년을 앞두고 대규모 드론 공격을 감행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배제한 채 진행 중인 평화 협상이 문화유산 반환 문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dsu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