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년간 공연 건수 1만6377건
창작 신작 올라가도 사장되기 일쑤
국공립단체·대형 제작사만 살아남아
신작도 중요하나 2차 제작 지원 필요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1. 이름 현미옥,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 앨리스 현(1903~1956?). 1920년대 상해 시절 ‘박헌영의 첫 애인’이었고, ‘거물급 남자들’ 사이에서 분탕질했다며 한국판 마타하리로 불린 여성. ‘공산주의 빨갱이’이자 ‘미(美) 제국주의 스파이’. 역사에서 사라졌고 오인과 모욕의 삶을 오갔으며, 그럼에도 주체적인 생을 보낸 그의 삶이 다시 살아났다. 연극 ‘아들에게’다.
#2. 2019년 4월 1일, 장국영의 기일인 만우절. 홍콩의 걸거리 한복판에서 난데없는 총격전이 일어난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가까스로 수화기를 든 채 나누는 아내와의 마지막 전화, 그리고 피 튀기는 총격전. 장국영을 사랑해 그의 추모 여행에 나선 ‘장사모’(장국영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의 영화 오마주 장면이다. 요즘 말로 치면 ‘장국영 덕후’가 홍콩의 자유를 외치는 우산혁명의 MZ(밀레니얼+Z) 시위대와 마주하며 서로의 가장 소중한 것을 지켜나가는 이 연극은 ‘굿모닝 홍콩’(4월 6일까지, 국립정동극장 세실)이다.
무사히 생존했다. 두 무대의 공통점은 초연 이후 살아남아 마침내 ‘두 번째 공연’으로 관객과 만난 작품이라는 점이다. 잘 키운 신작도 눈물을 머금고 버려야 하는 것이 공연계의 현실. 영혼을 갈아 넣은 ‘자식 같은 작품’은 초연 한 번으로 사라지기 일쑤다.
3일 공연예술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대중음악을 제외한 연극, 뮤지컬, 무용 등의 총 공연 건수는 1만6377건. 관객에게 눈도장을 찍은 초연작 중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작품은 자금력을 확보한 제작사와 국공립 단체의 작품 일부만 해당된다. 각종 극단, 민간 단체 등에서 올리는 초연작은 80~90%가 재공연 없이 사장된다. 공연계에서도 자본의 논리가 만든 빈익빈 부익부가 이어지는 셈이다.
서울문화재단 관계자는 “수많은 작품이 제작, 공연되지만 제작에 들인 창작자들의 노력과 고민의 시간에 비해 재공연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며 “새로운 창작 작품이 관객과 문화예술인에게 자극과 영감을 주지만 인상적이었던 작품을 다시 감상하며 느낄 기쁨의 기회는 늘 부족하다”고 짚었다.
의욕만으론 ‘언감생심’…2차 제작지원 덕 재공연 숨통
민간 예술단체에 있어 재공연은 일종의 ‘모험이자 도전’이다. 다시 무대에 오르기 위해 들여야 하는 제작, 운영비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2006년 창단한 극단 그린피그의 주은길 조연출은 “어지간한 각오를 가지지 않는 이상 한 번 무대에 올라간 작품이 재연, 삼연을 거쳐 레퍼토리화된다는 것이 쉽지 않다”며 “해마다 오르는 신작 중 대부분은 사장된다”고 귀띔했다. ‘아들에게’를 올린 극단 미인의 이정은 PD는 “신작을 하나 올려 관객들의 반응이 나온다고 해도 티켓 수익만으로는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 없다”며 “직접이든 간접이든 지원 없이 재공연을 올릴 수 있는 단체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나마 연극 ‘아들에게’와 ‘굿모닝 홍콩’이 사장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2차 제작지원’ 사업 덕분이다. 2차 제작지원이라는 명칭은 국립정동극장에서 처음 만들었고, 이곳에서 처음 생겨났다.
이수현 국립정동극장 문화사업팀 팀장은 “대부분의 극장에선 인큐베이팅 기반의 제작과 지원이 이뤄지는데 공연계에서 굉장히 잘 만들었는데도 여러 여건과 제약으로 사라지는 작품이 많다”며 “인큐베이팅의 단계를 넘어 디벨롭먼트 단계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국립정동극장의 2차 제작지원은 ‘창작ing’ 지원 사업의 선정 작품 중에 뽑아 극단과 극장이 ‘공동 파트너’로 작품을 함께 키워간다. ‘창작ing’는 일종의 1.5차 지원 사업 격이다. ‘굿모닝 홍콩’의 최원종 연출가는 “창작 초연은 어떻게든 한다고 해도 재공연의 제작비를 마련한다는 것이 단체 입장에선 쉬운 일이 아니다”라며 “창작 ing는 재공연할 만한 작품을 선정하는, 흔치 않은 제도였다”고 했다.
공연계 전장르를 아우르는 창작ing는 공연계에서도 꽤나 화제였다. 제작비를 전액 지원하는 사업인 만큼 창작자들의 다양한 아이디어가 무대로 구현되는 통로가 됐다. 이를 이어받은 2차 제작지원은 국립정동극장이 모든 제작비를 지원, 좋은 작품의 장기 플랜을 함께 세운다. 2023년 뮤지컬 ‘딜쿠샤’, 2024년 연극 ‘이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등에 이어 올해는 연극 ‘굿모닝 홍콩’이 2차 제작지원 작품으로 뽑혔다.
2차 제작지원 사업은 사실 윈윈이기도 하다. 극장에선 괜찮은 콘텐츠를 확보해 레퍼토리로 쌓을 수 있고, 단체에선 미래 먹거리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잘 키운 작품을 지속가능한 IP(지적 재산권)로 이어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창작진들의 아쉬움을 채워준 국립정동극장의 시도 이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 창작산실 2차 제작지원 사업, 서울문화재단의 ‘쿼드초이스-재연을 부탁해’ 지원 사업이 올해 생겼다.
서울문화재단 관계자는 “‘재연을 부탁해’ 공모 사업은 공공이 주목하지 못한 형태의 창작자 지원은 무엇일까 하는 고민에서 비롯됐다”며 “새로운 작품 제작을 통해 극장의 레퍼토리를 구성하는 것보다 현장 예술가들의 레퍼토리 구성을 위한 재공연 지원이 공공극장의 역할이라 판단했다”고 말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도 신작 발굴 프로젝트의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과 함께 2차 제작지원을 동시에 진행하며 “우수한 신작의 시즌제 가능성”을 모색하도록 했다. 지원 대상은 2021~2023년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 선정작과 2021년~2023년 ‘봄 작가, 겨울 무대’ 무대공연 선정작이다. 시범 사업을 거쳐 올해 본격적으로 시작, 각 장르마다 작품을 선정해 민간 단체에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다.
예술위 관계자는 “창작산실 작품들이 일회성으로 초연되고 사장되는 상황을 방지하고자 했다. 특히 단순 초·재연을 넘어 초연 이후 아쉬웠던 부분, 관객 등의 피드백을 반영해 2차로 발전, 제작 지원을 이어나가고자 한다”며 “이에 더해 창작산실 선정작이라는 브랜딩을 유지, 확산하려는 의의도 있다”고 설명했다.
연극 ‘아들에게’가 다시 관객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이 사업에 지원을 받아서다. ‘아들에게’는 2024년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 선정됐고, 올해는 2차 제작 지원 작품에 선정돼 최근 8일간의 공연을 마쳤다. 이정은 PD는 “사실 초연 이후 이 작품이 무대에 다시 오를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해 대극장 세트를 만들어놓고도 그냥 폐기했다”며 “이번 지원 사업에 선정되며 무대를 다시 만들어 공연을 마쳤다”고 했다.
무용 ‘클라라 슈만’도 2차 제작지원 작품에 선정돼 공연을 마쳤다. 안무가인 제임스 전과 공연기획사 아트플레이가 손잡은 작품이다. 노민혁 아트플레이 제작기획부장은 “순수예술단체는 재정적 지원이 없으면 새로운 작품을 만들거나 발전시킬 기회가 없다”며 “우리나라에선 발레 최초로 클라라 슈만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었기에 완성도를 높여 전국의 공연장 유통과 해외 출품 욕심이 있어 이 사업에 공모하게 됐다”고 말했다.
‘엑스트라 연대기’로 2차 제작지원 작품에 선정된 그린피그의 주은길 조연출은 ”2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 공연을 다시 올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못했는데 재공연을 하게 돼 의미가 크다”며 “이런 사업이 많아지면 극단들이 소극장 위주의 공연에서 벗어나 대극장 연극도 고려해 창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지속가능 무대를 향한 희망…“새로운 동력 돼”
매번 새로운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콘텐츠 홍수 시대에 충분한 시간적 여유와 제작 기간을 갖고 높은 수준의 무대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2차 제작 지원 사업이 생기며 창작자들의 숨통이 트인 것은 고혈로 만들어 낸 작품을 폐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 때문이다.
다만 지원 사업의 한계는 여전하다. 지원금 규모와 유통의 한계, 제약도 직면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전 장르에 걸쳐 지원하나 최대 지원액은 연극은 최대 1억 원, 뮤지컬과 오페라는 1억8000만원, 무용, 음악, 전통예술은 7000만원 등으로 제한했다. 단체들은 “아무래도 창작산실 지원금의 절반이라 이전 무대의 퀄리티를 유지하고자 하는 창작자의 욕심에 자부담 비용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아쉬움도 들려줬다.
실제로 ‘아들에게’는 창작산실 당시 1억8000만원, 2차 제작지원에서 8500만원을 지원받았다. 초연 당시의 퀄리티를 맞추기 위해 비용 중 50%를 자부담으로 충당했다. ‘클라라 슈만’의 경우 2차 제작지원작에 선정된 이후 국내 기초문화재단에서 초청받아 공연을 올렸으나 중복 지원의 제약으로 초청을 고사했다.
그럼에도 잘 설계된 지원사업은 공연계에 괜찮은 성공작을 여럿 배출한다. ‘아들에게’가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앞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주체’ 지원이라는 중장기 사업을 통해 3년간 신작 제작 지원을 받아 개발됐고, 창작산실을 통해 첫 무대를 올렸으며, 2차 제작지원을 통해 재연의 기회를 맞게 됐다.
이정은 PD는 “엄청나게 많은 공연 중에 이런 지원을 받으면 민간단체 입장에선 콘텐츠로서 자생력을 가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예산 등의 직접 지원을 넘어 장기적으로 안전한 환경에서 지속가능한 활동을 할 수 있어야 공연계 전체의 건강한 생태계도 만들어진다. 이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선 유통까지 확장한 지원 사업도 구상 중이다.
국립정동극장은 이미 이러한 난관을 염두, 2차 제작지원 과정에서 창작자들과 함께 작품을 발전시키며 탄탄한 콘텐츠로의 방향성을 잡고 지역 공연으로의 유통까지 ‘풀 패키지’ 지원을 하고 있다. ‘굿모닝 홍콩’은 오는 6월 화성문화재단을 시작으로 안산, 대구, 밀양에서 대극장 공연을 이어간다.
최원종 연출가는 “‘굿모닝 홍콩’이 2차 제작지원에 선정된 후 극장에서 앞으로 10년을 내다보고 정동극장과 같이 갈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며 “이런 제안과 지원 덕에 연출가, 작가, 스태프들이 작품을 대하는 마음이 완전히 달라지게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10년을 내다보고 작업을 한다는 것은 (민간) 단체로서 굉장히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활동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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