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제주 약천사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 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천년고찰 경북 의성 고운사가 역대급 산불에 쓰러졌다. 며칠 동안 경상남북도를 휩쓴 산불이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앗아가고 전통 사찰과 역사적 문화유산을 한 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일정 주기로 반복되는 안타까운 현실이며 불이 잘 옮겨붙는 소나무가 유별나게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산불의 영향권에 있던 영천의 천년고찰 은해사와 그 말사들도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남쪽 제주에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그 양이 많지 않았지만 그나마 주불을 잡는 데 이바지를 했다. 비가 오길 바라는 전 국민의 마음, 봄비의 고마움을 절실하게 느끼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재민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3월 말 꽃샘추위가 이어져 마음이 언짢았다.

제주에 간다고 하면 서귀포 약천사를 가봤냐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제주에는 천년고찰로 많은 역사 유적을 간직한 23교구 본사인 관음사가 대표 사찰로 자리매김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천년고찰도 아니고 역사 유적도 없는데 약천사를 가보라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따뜻한 남제주의 문화와 풍광과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사찰이고 동양 최대의 법당을 보유하고 있어 관광지로도 손색이 없는 사찰이었기 때문이었다.

약천사는 특이하게도 제주 관음사 말사가 아닌 혜인 스님이 1981년 창건을 시작해 1996년에 낙성식을 가진 경북 영천의 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였다. 업무차 제주를 가는 김에 꽃샘추위를 무릅쓰고 서귀포 약천사를 가보고, 제주 관음사에서 열린 ‘제주불교 4·3 추모 위령제’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혜인 스님과 도약샘

약천사는 한라산을 배경으로 태평양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서귀포 동쪽 지역에 있다. 그래서인지 약천사 초입 조그만 하천 다리를 건너니 ‘태평양전쟁 위령탑’이 건립돼 있다. 일제의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강제로 동원돼 희생된 수많은 우리 동포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이곳 약천사 부지에 2009년 제주도에서 건립했다.

이곳은 예부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도약샘(돽새미, 도욕샘)이라는 수질 좋은 약수가 있어 기갈을 해소하고 병을 낫게도 해 지역민에게 신성시된 곳이었다. ‘1918년(무오년) 법정사 항일운동’ 당시 일제에 끌려갔다가 옥고를 치르고 나온 방동화 스님이 출소 후 몸조리를 위해 한동안 머문 곳이라는 기록도 있다. 그래서 약천사에선 1918년부터 이곳에 약수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1960년대 유학자 김형곤 선생이 신병 치료 차 자그마한 굴속에서 100일 기도를 올리던 중 꿈에 약수를 받아 마신 후 건강을 회복해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고자 약수암을 짓고 수행 정진하다 그곳에서 입적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약천사의 창건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통일신라시대 인근 한라산 중턱에 법화사(법화사지 터가 있고 복원 중)라는 제주 최대의 사찰이 있었기에 그 부속 암자가 인근에 산재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약천사가 자리한 곳에도 사철 마르지 않는 약수가 솟는 곳으로 약수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오래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981년 약천사 창건 당시에는 이곳 1500㎡(450평) 터에 약수암이라는 60㎡(18평)짜리 초가삼간이 전부였다고 한다.

창건주인 혜인스님은 1981년부터 오직 불자들의 보시로 본격적인 불사를 시작해 1988년 지하 1층 지상 30미터의 대적광전을 착공해 오백나한전, 범종루, 법고루, 요사채 등 모든 전각을 1996년 완성하고 대가람 낙성식을 가졌다. 약천사는 바람이 많고 비도 자주 내려 야외에서 법회를 치르기 힘든 제주의 특성을 고려해 2000명 이상 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대법당을 짓게 된 것이라 한다.

성철 스님(1914~1993년)의 지도로 200일 동안 108만배 기도를 성취하신 스님으로 유명한 창건주 혜인 스님은 1943년 제주 출생으로 13세에 출가해 은사인 일타대화상(1929~1999년)의 지도로 약천사를 창건하고 약천사 회주 및 은해사 조실을 지내고 2016년 입적했다.
동양 최대의 법당 대적광전

입구에 주황빛 열매를 가득 품은 천혜향 나무들이 즐비하고, 떨어진 열매들이 여기저기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여러 그루의 야자수 나무와 두 개의 큰 돌하르방이 일주문 역할을 하는 듯하고 잘 꾸며진 분수 연못을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니 연못 바로 위 3층 형 요사채 사이에 ‘도욕샘’ 이정표가 보인다.

이곳 샘물이 연못을 이룬 듯 물이 수정처럼 맑아 연못 속 항아리에 소원을 빌며 동전을 던지는 분들도 많다.

돌하르방 앞에서 바라보니 웅장한 약천사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누각인 듯 아닌 듯 모호해 보이는 성곽처럼 길게 누운 3층 형 요사채 건물 너머 동양에서 가장 크다는 법당 대적광전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3층 형 요사채 좌우에 북각과 종각이 성곽 망루처럼 높이 솟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범종이 18톤이나 된다 하니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요사채 중간계단을 올라가면 대적광전 앞마당이 펼쳐진다. 조그만 코끼리 조각상들이 마당 주변으로 빙 둘러서 있고 조선시대 초기 전통 양식으로 지어진 3층 구조의 30m에 달하는 웅장한 건축물 대적광전은 화려한 단청과 섬세한 문양으로 다가온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과 김제 금산사 미륵전의 중층구조 건축양식을 응용해 지었다고 한다. 2000명이 들어간다는 법당 안에 모셔진 국내 최대의 비로자나불좌상과 양옆에 약사여래불 좌상과 아미타여래불이 있고 대적광전을 받치고 있는 네 기둥에는 여의주를 몰고 승천하는 황룡과 청룡이 조각돼 있다.

내부로 통하는 2층에는 많은 벽화와 8만불이 조성돼 있다고 하는데 법당 안이라 조심스러워 2층 입구도 찾지 못하고 조심스레 밖으로 나오니 내가 좋아하는 포대화상이 배를 드러내고 있다. 약천사는 과거 이 땅에 있었던 법화사의 영화를 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적광전 어느 곳엔가 세종의 아들이었던 문종 임금과 현덕왕후, 그리고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대적광전 지하 포산갤러리에서는 대표적인 전통 불화인 ‘수월관음도’의 전시 및 판매를 하고 있다고 해 둘러보며 창건주 혜인스님과 그의 스승 일타스님에 대해서도 잠시 살펴볼 수 있었다.

대적광전 우측 언덕 위에는 7층 형태의 불사리탑이 있고, 뒤쪽 언덕길을 따라가다 보면 주불로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있는 굴 법당이 나온다.

천연동굴 형태로 꾸며져 있는 굴 법당은 이곳에서 기도하며 약천사 대작불사를 이뤘다고 한다.

옛 약수암을 상징하듯 약사여래 기도도량으로서 조용한 기도처로 역할하고 있다.

돌아서 내려오는 길 한편에 있는 돌계단을 올라가니 삼성각이 있고 그 초입에 또 다른 범종이 있는데 요사채 위의 범종에 비해선 조그마한데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라 한다.


동쪽을 향한 2층으로 된 전각인 ‘오백나한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각기 다른 모습과 다른 채색으로 아름다움을 더한 5백 나한이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은해사 거조암과 같은 배치라고 한다.
템플 스테이 또 하나의 자랑

‘아미타불이 어디 있는가(阿彌陀佛在何方)’
나옹화상이 염불삼매에 들었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읊은 게송(偈頌)에 나온 글이 약천사 앞 너른 잔디 마당에 있는 크나큰 돌에 새겨져 있다.
“생각하다 생각이 다 하여 생각이 없는 곳에 이르면 찬란한 빛이 되어 나타난다는 아미타불”

약천사는 템플스테이 명소이기도 하다. 제주 남쪽 바다를 조망하며 조용히 자신과 만나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는 힐링 장소라고 해 내외국인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약천사는 한국불교 전통문화와 따뜻한 남쪽 제주의 풍광이 결합한 곳이라 이런 말들이 나온 듯하다. 휴식형과 체험형 등 선택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제주의 평온한 풍광 속에서 불교문화도 배우고 자신을 일깨우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약천사를 나오는 길에 4월을 앞둔 따스한 봄바람을 느끼며 유채꽃과 벚꽃이 좌우에 활짝 핀 도로를 따라 올레길 8코스 해안 길로 접어들었다.

딱 트인 태평양 앞바다를 보며 가슴도 뻥 뚫리는데, 서귀포를 조금 벗어나니 겨울 찬 바람이 쌩쌩 부는 꽃샘추위가 심해진다.

3월 말임에도 우박이 내리던 날, 제주 관음사에선 ‘제주불교 4·3 추모 위령제’가 열리고 있었다. 4·3 당시 제주불교는 불교혁신에 앞장섰던 열여섯 스님들이 입적했고 제주도 내 56개의 사찰이 소실되거나 피해를 봤다.
4·3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 화해와 상생의 종교로서 평화와 화합을 위한 자리인데, 해마다 위령제를 지내는 3월 마지막 주 토요일은 날씨가 변덕이라고 참석한 신도분의 혼잣말이 들린다.

허운 관음사 교구장 스님은 불교는 ‘국가를 구한 종교’라고 강조했다. 숭유억불로 불교가 억압받던 조선시대에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승병 활동을 하다가 수많은 사찰이 화마의 피해를 보았고, 일제강점기 때 제주에서도 ‘1918년(무인년) 법정사 항일운동 항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3·1운동 5개월 전인 1918년 10월 7일 서귀포 법정사 승려들이 중심이 돼 마을주민 700여명과 함께 일본인들을 제주도에서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시키겠다는 무장 항일운동을 벌인 것이다.
또 허운 스님은 “불교는 배척하지 않고 배려하며 포용하는 종교로서 지금의 분열과 갈등 혼란의 시기엔 화해와 상생의 불교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라고 역설했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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