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요망 졌던 문학소녀의 눈에 시간의 길이가 쌓였다. ‘너무도 어렸고, 여전히 여린’ 계절을 보내온 애순의 눈은 온 날들을 살아도 맑았다.
“애순이와 함께 사계절을 보내고 나니 ‘만날 봄인 듯’ 살 수 있겠더라고요.”
사계절을 살아낸 뒤 만난 ‘장년의 애순’ 문소리(사진)는 “촬영 직전까진 온갖 번뇌에 사로잡히고, 어디 놓친 걱정은 없나 걱정하고 또 했다”고 털어놨다. ‘대본의 힘’에 이끌려 후루룩 읽어 내려간 뒤 “어떤 역할이든 관계없이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드라마에 승선했다.
하지만 한 사람의 긴 생을 두 배우가 나눠 맡는다는 것이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문소리가 연기한 애순은 1951년생, 30대 후반부터 70대까지. 이미 시청자의 마음 안에 콕 박힌 소녀 애순의 시간을 건너뛰는 일이었다.
“봄·여름에는 동네를 떠들썩하게 할 만한 사건을 저지를 만큼 휘황찬란했다가 가을·겨울엔 보편적 엄마의 삶이 들어왔어요. 특별한 것 없어 보이는 엄마 안에도 ‘요망진 소녀’ 애순이의 본질은 있어야 한다고 봤어요.”
꿈 많던 문학소녀와 평범한 엄마를 버무려 한 명의 인물로 보여주는 게 문소리에겐 ‘어렵고 큰 미션’이었다. 그럼에도 문소리는 애순이 ‘생존의 외투’를 한 겹 한 겹 걸치는 과정을 잘 살려 연기했다. 이에 먹고 살길이 막막해도 할머니 앞에서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 못 했던 ‘초보 엄마’ 애순은 가판에서 오징어와 멍게를 척척 손질하며, 서울대 나온 딸 금명(아이유 분)을 자랑하는 ‘억척 엄마’가 됐다.
집안 곳곳에 묻어난 생활 연기의 흔적도 모두 문소리의 손을 거쳤다. 애순의 집에 놓인 빨래, 김밥을 쌀 때 쓰는 미지근한 물 종지, 손자를 싸맨 포대기 같은 소품을 하나하나 다 챙겼다. “원래도 살림은 직접 한다”는 그는 현장에서 준비한 소품도 다시 매만져 장년 애순을 ‘문소리화’했다.
“지금의 우리는 엄마들의 20대가 어땠는지 상상하기 어렵잖아요. 대체 늙는다는 것이 뭘까 싶더라고요. 관식에게 여린 꽃처럼 사랑받은 ‘꽃밭의 여자’가 지닌 소녀다움과 세월이 지나며 ‘억세고 거칠어진 여자’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었어요. 아무리 많은 풍파를 겪어도 고운 면을 간직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주름의 깊이에도 삶에 찌들지 않은 해사한 얼굴은 ‘요망진 소녀’였던 모두의 엄마를 떠올리게 했다. “관식을 보내며 ‘수만 날이 봄이었다’고 하는 대사가 콕 박혀요. 자신의 삶을 규정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정말 대단한 어른인 것 같아요. 머리는 눈이 내린 것처럼 하얀데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삶, 참 찬란하고 대단하지 않나요.” 고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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