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 국회 설득·읍소에도 결국 무위로

‘총 주주 이익’ 개념 모호해 대혼란 불가피

배당 대신 투자 늘렸다가 주주소송 불 보듯

이사 소송비용 부담은 누가…기업만 손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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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김현일 기자] “무더기 주주소송이 몰려오면 회사는 이사들의 변호사 비용도 감당해야 할 겁니다”, “소송 당할까봐 어느 누가 큰 돈 들어가는 인수합병(M&A)이나 신사업 진출을 결정하겠나”.

상법 개정안이 결국 국회의 최종 문턱을 넘으면서 국내 기업들은 비상이 걸렸다. 국내 저성장 위기와 미국 트럼프발 통상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되레 기업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법안이 등장하면서 리걸(법적) 리스크가 상시화될 수 있다는 공포가 현실화됐기 때문이다.

경제계는 지난 1년간 정치권을 상대로 읍소와 설득을 반복하며 상법 개정안 통과를 저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끝내 야당 주도로 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되면서 이는 수포로 돌아갔다. 기업들은 상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우려했던 위험 요인이 실제 나타날 것으로 보고 있다. 주주소송 남발과 행동주의 펀드의 경영권 공격 등으로 사업 경쟁력 약화가 불 보듯 뻔하다는 입장이다.

‘총주주이익’ 모호성 논란

14일 재계의 의견을 종합하면 기업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은 ‘총 주주의 이익’이라는 표현부터 모호해 큰 혼란이 불가피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개정안은 ‘이사가 그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총 주주의 이익을 보호해야 하고, 전체 주주의 이익을 공평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주주들의 주식소유 목적부터 저마다 다른데 이사가 모든 주주의 이익을 똑같이 보장한다는 것부터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러한 개념상 모호함 때문에 앞서 법무부와 법원행정처도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놓은 바 있다.

김석우 법무부 차관은 지난 1월 22일 법안심사제1소위원회 회의에서 “총 주주라 했을 때 기준점을 어디에 둘 지 찾기가 어렵다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배형원 법원행정처장도 “혼란을 최소화하려면 이사가 부담하는 의무책임이나 주주의 구제수단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규정을 두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주주소송 남발로 적자감수 신사업 진출 사실상 어려워져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사업장. [삼성전자 제공]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사업장. [삼성전자 제공]

일반적으로 한 기업의 주주는 대주주부터 소액주주, 사모펀드 등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이해관계가 다른 이들로 구성된다. 대주주가 장기적인 안목으로 투자재원 마련을 중시한다면 소액주주는 배당 증대 같은 당장의 이익을 우선시할 수 밖에 없다.

이사로선 각기 다른 주주들의 의견을 모두 만족시키는 의사결정을 하기란 불가능하다. 만약 이사가 인수·합병(M&A) 등 투자재원 마련을 위해 배당액 상향을 유보할 경우 소액주주들로부터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적 책임추궁에 시달릴 수 있다.

앞서 국내 경제단체 8곳은 공동성명에서 삼성전자가 1983년 반도체 진출 선언 이후 1987년까지 1400억원의 누적 적자를 기록한 점을 언급하며 “주주들이 이를 문제 삼아 소송을 남발했다면 지금 한국 경제를 지탱하는 반도체의 성공은 없었을 것”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이러한 우려에도 상법 개정안은 전날 별도의 보완장치 없이 통과했다. 경제계는 기업의 경영 활동에 심각한 리스크로 작용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4대 기업 한 관계자는 “앞으로 이사들은 소액주주들로부터 잉여자금을 배당 재원으로 활용하라는 거센 압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천문학적 소송비, 재무건전성 악화 불보듯

김창범 한국경제인협회 부회장이 지난달 2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주주 권익 및 기업가치 제고를 위한 경제단체 간담회에 참석해 모두발언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김창범 한국경제인협회 부회장이 지난달 2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주주 권익 및 기업가치 제고를 위한 경제단체 간담회에 참석해 모두발언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재계의 반발이 거센 가운데 실제 상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주주소송 남발에 대한 법적 방어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소송을 당한 이사의 변호사 비용을 회사가 지급하고, 회사도 해당 소송에 참가할 수 있도록 상법을 개정해 이사의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6월 한국경제인협회와 한국상장회사협의회, 코스닥협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행법에서 회사 대표자가 법인 비용으로 변호사를 선임한다면 원칙적으로 업무상 횡령”이며 “이사가 의무이행과 관련한 책임추궁을 받을 경우 (소송) 비용을 일정한 범위에서 회사가 지급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어 “주주소송에서 회사가 피고(이사)측에 참가할 수 있도록 허용해 이사의 소송비용 등 재정적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사의 방어권을 보장하고 소송비용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대안이지만 이 경우 회사 입장에선 주주소송 남발에 따른 비용 증가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崔 재의요구권 행사 ‘마지막 희망’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지난달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사랑재에서 열린 국회-정부 국정협의회 첫 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지난달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사랑재에서 열린 국회-정부 국정협의회 첫 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경제계와 국민의힘은 우선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상법 개정안에 대한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요청했다. 아울러 상법이 아니라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주주이익을 충분히 보호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전날 입장문에서 “상법 개정이 아닌 자본시장법을 통해 보다 합리적이고 실효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한홍 국민의힘 의원이 대표로 발의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상장회사가 합병·분할 시 주주이익 보호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인수합병 시 해당 기업에 대한 외부 평가기관의 평가와 공시를 의무화해 소액주주들도 정보를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물적분할 후 자회사를 상장할 때 모회사 일반주주에게 공모주의 20%를 우선 배정하는 내용도 담겼다. 과거 전기차 배터리 등 성장이 유망한 사업부문을 물적분할 후 상장했다가 모회사 주주들이 주가 하락으로 피해를 호소한 만큼 이를 막고 물적분할 후 상장한 유망 사업의 가치도 향유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다. 상법이 100만개가 넘는 모든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 달리 자본시장법은 2600여개 상장사만을 겨냥한 ‘핀셋 규제’인 만큼 현재 제기된 과잉입법 논란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joz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