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카라바조의 그림자’ 개봉
그의 내면·예술적 성취 교차 조명
작품 보듯 명암 대비 연출 돋보여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치열하게 쏟아지는 빛줄기를 따라 아기 예수를 부드럽게 받친 맨발의 성모가 극적으로 드러난다. 마치 어둠 속 숨어 있는 신성함을 드러내는 듯 성모의 표정은 단호하면서도 온화하다. 그렇게 카라바조의 손끝에서 탄생한 그림 ‘성모자와 성안나’는 성 안나 성당에 걸렸고, 화폭 속 성모의 발끝에서 교황은 무릎꿇고 기도했다.
그런데 성모의 모델이 된 여인은 다름 아닌 매춘부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교황은 분개했다.
우리에게 카라바조로 알려진 이탈리아 화가 미켈란젤로 메리시(1571~1610)의 삶을 그린 영화 ‘카라바조의 그림자’는 단순한 전기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진 교회에 도전한 카라바조의 고뇌로 가득 찬 내면과 예술적 성취를 교차하며 조명한다.


영화는 살인죄로 기소돼 도망자 신세가 된 카라바조와 그의 사면을 조사하는 비밀 조사관 ‘그림자’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일종의 추적극이다. 카라바조의 가치와 대척점에 있는 ‘그림자’의 존재를 통해 자유와 권력, 진실과 거짓, 그 사이 복잡하고 다면적인 관계가 논쟁적으로 드러나는 점이 흥미롭다.
카라바조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와 함께 꼽히는 세계 3대 천재 화가다. 바로크 미술을 탄생시킨 카라바조는 빛과 어둠의 대비로 메시지를 담아내는 독창적 기법을 구현했다. 한 사람의 작품이라기에는 믿을 수 없는 그의 천부적 재능에 루벤스, 렘브란트, 벨라스케스가 뒤를 따랐다.
카라바조는 성경 속 인물과 이야기를 이상화된 이미지로 그리는 당대 관습을 따르지 않았다. 악취가 진동하는 밤거리를 배회하는 가엾은 이들이 그의 모델이었다. 그의 화폭에서 십자가형을 당하는 성 베드로의 모델은 술냄새가 진동하는 거리의 부랑자였고, 눈물 흘리며 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델은 졸고 있는 매춘부였다.

그렇게 버림받은 자들의 생생한 고통이 카라바조 작품 세계의 주인공이 됐다. “(카라바조처럼) 고통을 아는 자만이 이런 걸작을 그릴 수 있다네.” 극중 대사처럼 카라바조는 당대 사회에 감춰진 아픔을 드러냈고, 그래서 예술은 단순한 미적 표현을 넘어선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다만 이런 카라바조의 현실주의적 회화는 당시 종교와 정치 권력에 큰 파장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마치 카라바조의 그림을 감상하듯 명암 대비를 강조한 연출로 미적 요소가 돋보인다. 영화 속 인물들이 빛과 어둠의 경계를 넘나들며 내면 갈등을 드러내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특히 나폴리로 도망친 카라바조를 보호한 코스탄차 콜론나 후작 부인(이자벨 위페르 분)의 섬세한 시선이 영화에 깊이를 더한다. 부인은 카라바조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돈 많은 후원자가 아닌, 진정한 인간성의 의미를 따져 묻는 시대적 선구자로 묘사된다.
‘교황의 사면을 바라면서도 그림에 대한 사면은 필요치 않다’는 카라바조의 단호한 태도에서 “카라바조의 예술적 진정성을 회복하고 싶었다”는 미켈레 플라치도 감독의 메시지를 오롯이 만날 수 있다. 단순히 한 위대한 예술가에 대한 영화가 아닌, 카라바조가 불멸의 화가로 이름을 남길 수밖에 없는 이유를 탐구한 결과물에 가깝다.
스크린 위에 온전히 담긴 카라바조의 대표작 ‘성모의 죽음’, ‘성 마태오의 소명’, ‘메두사’ 등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는 재미도 있다. 특히 카라바조의 문제작으로 일컬어지는 작품들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도 영화적으로 연출됐다는 점에서 호기심을 자아낸다. 미술 애호가라면 꼭 찾게 되는 영화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오는 22일 개봉. 120분. 청소년 관람 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