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0회> 붉은 길, 푸르른 마음 58
“파 선생님,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어요? 서로 법전을 넘겨가며 소모전을 벌여봐야 서로에게 손해 아니겠어요?”
파 선생님? 신희영이 파파라치와 문자 소통을 하면서 본인도 모르게 내뱉은 호칭이었다. 불현듯 스마트폰으로 날아든 동영상을 보고 난 후 잠시 동안 뒷목을 잡고 쓰러져 있던 그녀가 곧 정신을 차리고 협상모드로 돌아섰던 것이다.
“그렇지요. 소모전을 벌여봐야 사모님만 손해지요.”
문자 답장이 곧바로 되돌아오는 것을 보니 상대방 파파라치의 연령대를 알 만도 했다. 일단 스마트폰의 글자판 위에서 손가락이 쌩쌩 돌면 30대 초 중반이라고 보아도 과히 틀리지는 않을 터! 파파라치를 30대 초반이라고 단정 지은 신희영은 대뜸 센 어조로 내지르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사모님이라고 호칭하지 마세요. 회장님이란 좋은 호칭을 두고 사모님이 뭐야? 촌스럽게.”
곧 이혼하게 되면 알토란 같은 회사 한 개쯤은 그녀에게 굴러떨어질 것이었으므로 회장이란 호칭을 가불해서 쓰겠다는 심사였을까? 평상시에도 그녀는 사모님이란 호칭에는 정색을 하고 도리질을 치지 않았나.
“알겠어요, 회장님. 어서 담판이나 짓자고요.”
“얼마?”
“일단 1억!”
“뭐예요? 1억이 장난인가? 1억이 강아지 이름인 줄 알아요? 그리고… 일단 1억은 또 뭐야? 그럼 앞으로 2단도 있고, 3단도 있을 거란 말예요? 이 양반 웃기네.”
“웃기는 건지 아닌지 확인 좀 해보시렵니까? 우선 이코노미 석에 있는 수행원들에게 먼저 이 영화를 보여줄까요? 반응이 어떤지 확인하신 후에 슬슬 2단, 3단으로 기어를 높여보도록 할까요?”
신희영이 날을 세워보았으나 이른바 파 선생은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는 눈치였다. 이런 경우 다급한 쪽은 신희영일 뿐이었다. 그러니 부르는 게 값이지, 오히려 파 선생의 선처를 바라야만 할 뿐이었다.
스마트폰을 타고 이런 혼란이 스쳐 지나갔지만 좌석에 앉아 있는 승객과 승무원들은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태평하며 고요하기도 했지만, 파 선생이 너무나도 용의주도하게 일을 추진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도둑촬영, 입력, 전송, 협박, 협상에 이르기까지 파 선생의 일처리는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그 사이에서 망가지는 사람들은 신희영, 유호성, 강유리일 뿐.
‘일타 삼 피야. 마당 쓸고 돈 줍고, 칭찬받는 셈이로군. 흐흐흐….’
내 이럴 줄 알았다! 파파라치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30초 분량의 동영상 한 편으로 무려 세 사람에게서 군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요즘 같은 불황기에 월척을 낚은 셈이었다. 유민 회장, 신희영 자칭회장, 그리고 매니저 백광돌… 주둥이에 낚시 바늘이 꿰어 있는 불쌍한 횟감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아공행 비행기의 비즈니스 석 한쪽 구석에서는 심각한 회의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파파라치 선생의 예상대로였다. 신희영, 강준호, 백광돌, 그리고 모든 살림살이를 책임지고 있는 천 부장, 공 과장을 포함한 5자 회담… 영화 주인공들인 강유리와 유호성은 어디로 내팽개쳤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 제법 심각한 회의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당장 오늘 저녁 호텔비도 모자라는 판에 어디서 1억원을 구해오나요? 재간이 없습니다, 회장님. 그 방법… 유민 회장님과의 이혼 소송을 포기하는 것 외에는….”
천 부장은 급기야 신희영의 뇌관을 건드리고야 말았다. 이혼을 포기하기 전에는 가처분신청입네 뭐네 하는 규제 때문에 단돈 1원도 구해 올 수 없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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