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주의자 예술가이자 자유로운 난봉꾼이었던 몰리니에(하) (Molinier, artiste anar et libre-bandeur)
20세기의 자유인이었던 피에르 몰리니에(Pierre Molinier)는 일생동안 쾌락을 추구했고, 무수한 정부들을 거느렸고, 미풍양속에 충격을 주고, 타인들이 ‘악’이라 부르는 자신의 열정들을 구현하기 위해 애썼던 인물이다. 클로비스 트루이유(Clovis Trouille)의 절친한 친구이자 그와 함께 편의주의 및 청교도 도덕을 증오했던 몰리니에의 작품들은 현재 파리에서 1시간 떨어진 릴아당 루이 상렉 예술역사박물관에서 3월 7일까지 열린다.
규범에서 벗어났던 여장 남자, ‘육체예술’의 예고자, 퀴어 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했던 화가 겸 사진가의 초상을 10개 항목으로 정리했다.
6. “나는 방에서 살고, 잠자며, 즐기기로 결심했다.” “15세 나이였을 때 나는 신부가 되기를 원했다. 나보다 한 살 더 많았던 누이가 숨을 거두었다. 나는 혼자서 그녀의 임종을 밤새 지켰다. 나는 침대 위에서 시신을 포옹했다. 자기 여동생의 다리와 사랑에 빠진 한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 ‘배덕자(背德者)들’을 나는 사랑했다. 완전히 내 경우와 똑같았다.
그녀가 죽은 이후 나는 오늘날 내가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방 속에서… 그렇지… 방 속에서…. 이 방으로부터 거의 외출하지 않고서 말이다. 잠자고 또 쾌락을 즐기면서. 그리고 그림을 그리면서. 펌프질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도 만들었다.”(NRF 갈리마르 출판사가 펴낸 피에르 부르자드(Pierre Bourgeade)의 저서 ‘북극광’에 등장)
1960년대 초에 몰리니에는 멍에를 하나 제작했다. 그걸 이용하면 마치 곡예사처럼 머리를 다리 속에 끼운 후 자신의 음경을 입 속에 집어넣는 것이 가능했다. “이걸 개발하는 데 2년이 걸렸다. 나의 정액 외에는 아무 것도 마시지 않으면서 마치 요기들처럼 나는 18일을 보냈다”고 그는 고백했다.
몰리니에는 입 속에 자신의 남근을 넣은 모습을 사진에 담았고, 그런 다음 이 사진을 마치 초대장처럼 자신의 친구들에게 발송했다.
7. 산더미 같은 페티시들을 모으다. 1973년 2월에 처음으로 몰리니에를 방문했던 피에르 부르자드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몰리니에는 보르도 구시가지에 위치한 낡고도 먼지가 들끓는 한 호텔 내의 부엌 달린 2개 방에서 살았다. 두 번째 방에서 몰리니에는 작업하고, 식사했으며, 잠자고, 그림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또 사진을 현상하거나 확대하고, 목공일을 하거나, 주조하는 작업을 했다. 케케묵은 문을 열자마자 바로 들어갈 수 있었던 첫 번째 방 속에 몰리니에는 쓰레기더미를 30년 전부터 쌓아놓고 있었다. 1973년 2월을 기준으로 삼더라도 쓰레기더미의 무게는 족히 수톤이 넘는다.
매일 분량이 늘어나고 있는 더미의 꼭대기에는 검은 나무십자가가 꽂혀 있었는데, 십자가에는 ‘피에르 몰리니에, 1900-19-’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몰리니에는 적절한 때가 도래해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까지 글을 쓰고, 홀로 쓰레기더미 위에서, 여자 구두를 신고 화장을 하고서 곤두선 머리카락에 오랑캐꽃을 꽂은 채 잠을 자며, 종국에는 머리에 총을 쏴 자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NRF 갈리마르 출판사가 펴낸 피에르 부르자드의 저서 ‘북극광’)
8. 쾌락을 맛보며 밤낮을 지새다. 1966년부터 몰리니에는 수많은 젊은 남녀들을 집으로 끌어들였다. 나이는 대부분 20세부터 25세 사이였는데, 몰리니에는 그들을 분장시키거나 변장시킨 후 성적 일탈로 인도했다.
몰리니에의 가장 큰 기쁨은 스타킹과 하이힐의 쾌락 속으로 젊은이들을 입문시키는 것이었다. 몰리니에는 “스타킹을 신지 않은 여성은 나를 흥분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스타킹, 그것도 검은색 스타킹을 착용하는 즉시 나는 극도로 흥분하기 시작한다. 나에게는 아주 아름다운 다리를 지닌 정부가 있는데, 밤에 그녀와 대여섯 차례 관계를 갖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그와 절친한 여성들 중에는 비엔나 상황주의자의 일원이자 오스트리아 출신 미녀인 하넬 코에슈(Hanel Koech)와 태국 여성인 엠마누엘 아르상(Emmanuelle Arsan)도 들어있다. 대사였던 아르상의 남편은 소설 ‘엠마누엘’ 덕분에 유명해진 인물이다.
이 모든 남녀의 사진을 찍었던 몰리니에는 사진들을 잘라 조립한 후 기묘한 포옹을 하는 풍경을 만들어냈다. 뽐내는 가슴 위에 멋들어진 엉덩이를 올려놓았고, 또 마치 꽃다발처럼 무수한 다리를 가진 피조물들을 사진으로 만들어냈다.
9. “나는 당신이 얼간이라고 생각한다오.” 몰리니에는 모든 형태의 타협을 거부했다. 그는 오직 창작에만 몰두했고, 마지못한 경우에만 그림들을 팔았다. 때로는 자신의 작품을 되사기도 했다. 그와 가장 절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이었던 장-피에르 부익수(Jean-Pierre Bouyxou)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준다.
“재능보다는 돌출행동으로 인해 이름이 난 한 작가가 피에르 몰리니에 그림 사본을 보고 거의 미쳐버렸다. 그는 모든 방법을 통해 진본을 구입하려고 애썼다. 작가가 그렇게 탐내던 그림을 양도할 만한지 결정하기 전에 몰리니에는 작가의 작품들을 읽어보고 싶다고 그에게 알렸다.
소설들을 성실히 읽었으나 몰리니에는 작품들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다음 내용의 간결한 답신을 보냈다. ‘당신 책들을 읽어본 후 당신이 얼간이라는 사실을 알았소. 내 작품들 중 하나가 얼간이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내가 더없이 불쾌할 것 같소.’”(장-피에르 부익수의 저서 ‘펜트하우스(Penthouse)’, 1985년 3월)
10. 자살을 통한 몰리니에의 최후 몰리니에는 더 이상 쾌락을 즐길 수 없을 정도로 “나의 정액이 마치 물처럼 변하는 날” 자살하겠다고 선언했다. 1976년 3월 3일 그는 자살한다. 의사들이 그의 항문을 수술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전립선암이 원인이었다. 그는 입에 권총을 넣고서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상상 속의 죽음이 “편의주의와 인습적인 삶에 맞선 죽음”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미 세 차례에 걸쳐 자살 장면을 사진에 담은 바 있었다.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준 후 그는 마지막 도전을 감행한다. 자신의 ‘생식기가 30세가 난 한 불구 남성에게 이식되기를’ 기대하면서 그는 자신의 몸을 학계에 기증했다. 하지만 그의 소원은 실현되지 않았다. 아쉬운 일이다.
(이미지는 몰리니에의 사진작품) 글=아녜스 지아르(佛칼럼니스트), 번역=이상빈(문학박사ㆍ불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