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9회> 바람 부는 길 47
김지선은 아무 곳으로나 가자고 속삭였다. 남자의 귀에 더운 입김을 살살 불어넣으며 속삭이는 모습을 보면 꽃뱀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사실 그녀야말로 순수함 그 자체였다. ‘아무 곳으로나 가자’는 것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말과 의미가 같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음을 고백하는 여자야말로 얼마나 순수한가.
“여긴 강원도 촌구석이라 호텔도 없어요.”
“호텔은 무슨… 펜션도 좋고 민박도 좋아요. 아무 곳이나 좋아.”
“정말? 정말 아무 곳이라도 좋다고?”
“아무 곳이나… 빨리 갈 수 있는 곳으로!”
어허, 이게 웬 횡재냐. 전진후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1974년산 치타에 태웠다. 그리고는 무조건 스키장 출구 쪽을 향하여 차를 몰았다. 어서 스키장을 빠져나가 아무 방으로나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게릴라 레이싱을 보러 온 구경꾼들에 가로막혀 밖으로 빠져나가기도 어려웠다. 구경꾼들은 모두 포디움 쪽으로 몰려드는 중이었다. 물론 그들이 가로걸릴수록 전진후의 혈압은 높아져만 갔다. 우승트로피와 상금 3천만달러를 엉뚱한 놈에게 빼앗긴 것만으로도 열 받는 일인데 뭐가 어째? 그 모습을 구경하러 간다고?
“우리가 조금 전까지 게릴라 레이싱에 참가했던 선수들인 줄은 꿈에도 모르나 봐. 우리는 아예 안중에도 없어.”
“저 사람들 신경 쓰지 말아요. 어서 방이나 찾아보라고요.”
그녀는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그의 어깨에 기대며 재촉했다. 막바지 스키시즌에 게릴라 레이싱이 겹쳤으니 스키리조트 안에 있는 숙박시설은 이미 만원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자동차로 10~20분 떨어진 구역에서는 아예 쪽방도 구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호흡은 가빠지고 마음은 들떠 오르는 중이었으니 이걸 어쩌나. 가까스로 스키장을 빠져나왔더니 이건 또 뭐야? 도로포장과 주변정리를 새로 한 탓에 고속도로까지 곧장 길이 이어지도록 설계되어 있질 않은가.
“어머나, 고속도로로 들어서면 어떡해요? 급해 죽겠고만… 서울까지 가려고요?”
“그러게 말이야, 어떤 놈이 길을 이토록 한심하게 만들어 놨지?”
이미 가빠지고 뜨거워지기 시작한 그녀의 숨결은 걷잡을 수 없었다. 평소엔 얌전하던 고양이가 부뚜막에 올라서니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하더라는 말이다.
“오빠, 차 세워요. 우리 그냥 저기로 가요.”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자고?”
“시골 고속도로인데 어때요?”
“어디로 가자는 거야? 주위에 아무 것도 없잖아?”
그랬다. 주위에는 방처럼 보이는 것이라곤 전혀 없었다. 고개 들어 위를 보면 아직 차가운 바람이 가득 찬 푸른 하늘이 보일 뿐이고, 이리저리 고개를 둘러보니 잔설이 분분한 논두렁 혹은 야산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저기요, 저기!”
정녕 참을 수 없었는가? 그녀가 차에서 먼저 내려 야산 쪽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뛰어가는 쪽에는 아뿔싸, 수백, 수천마리 명태가 꽁꽁 얼어붙은 채 줄줄이 매달려 있는 황태덕장이 아스라이 보일 뿐이었다.
“황태덕장으로 가자고?”
“그래요. 사방 확실하게 가릴 수 있는 곳이 지금 황태덕장밖에 더 있어요?”
그녀의 대답이야말로 확실하고 명쾌했다. 사방 확실하게 가릴 수 있는 곳!
meel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