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날개에 숨긴 칼 (32)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지금 뛰어노는 게 아닙니다. 나도 미칠 노릇이라고요.”
“그럼 뭐예요? 배타고 나갈 시간이 지났잖아요, 글쎄.”
선장과 유호성이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김지선은 두더지처럼 모래바닥으로 파고들었는데, 어느새 쫓아온 젊은 승객들이 그녀 주위에 동그랗게 둘러서기 시작했다. 얼굴마저 모래바닥에 묻은 채 필사적으로 두더지 놀이를 하는 김지선의 모습에 그들은 저마다 희희낙락했다.
하지만 그들은 본능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는 중이었다. 미처 모래가 덮여지지 않아 고스란히 드러난 처녀의 등판이며 엉덩이를 보노라면 괜히 신이 났지만, 필사적인 그녀의 모습에서는 비장함마저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이 얼마나 학수고대하던 장면인가. 현성애는 영화장면보다도 더욱 극적인 이 모습에 그만 감격하고 말았다. 애초에 그들의 옷가지를 찢어 바닷물에 버릴 때만 해도 이처럼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한국전쟁 때 3개월 만에 서울을 수복하고 중앙청까지 진격하여 태극기를 게양하던 해병대원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이 감격! 이 통쾌함!
“아니, 이게 누구예요? 유호성 씨 아니세요?”
1차 감격을 맛보았으니 이번엔 지체 없이 후속타를 날릴 차례였다. 현성애는 알몸으로 선장과 대적하고 있는 유호성의 앞으로 한 걸음 불쑥 나서며 엄청 놀라는 연기를 감행했다.
“아니…다, 당신이 어쩐 일로…”
“유호성 씨 맞지요? 어머나, 이를 어째…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서 이런 험한 꼴을 당했어요? 저 여자 분은 또 누구고요?”
“아니… 그게… 그러니까…”
입이 열 개라도 대답을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수십 명의 옷 입은 사람들 앞에서 술통 조각으로 사타구니만을 가린 유호성으로서는 그만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술통조각으로 얼굴을 가리자니 그게 만 천하에 드러나고, 그걸 가리자니 얼굴이 팔리고…, 그 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옆에서는 김지선이 알몸으로 두더지 놀이를 하고 있었으니 일생일대 최악의 수치를 당하는 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물며…
“유민 제련그룹의 후계자께서 어쩌다가 이런 꼴을 당했어요? 네?”
끝내 밝히지 않으려 했던 비밀을 현성애가 술술 나발 불고 있지 않은가? 유호성은 차라리 죽고 싶을 따름이었다. 아, 이걸 어쩌나…
“뭐라고요? 저 분이 유민 제련그룹 후계자예요?”
“그렇다네요. 참 팔자 좋은 분이었구먼. 어쩐지…”
비록 승객들이 수군대는 소리였지만 어찌 유호성의 귀에 가 닿지 않으랴. 유호성의 얼굴빛은 이미 사색이 되어 있었다. 마냥 흐뭇한 사람은 오로지 현성애 뿐. 그러나 나중에 더 큰 치욕을 안기기 위해서는 이쯤에서 아량을 베풀어야만 했다. 이 정도면 충분이 망신을 당했을 터이므로…
“호성 씨! 사연은 나중에 듣기로 하고… 이거라도 빨리 걸치세요.”
현성애는 배낭을 뒤지더니 빨간색 고쟁이를 찾아 내밀었다. 하필이면 빨간 고쟁이를 내놓은 까닭이 뭐냐고? 그게 모두 지난 이틀 동안 꾸며낸 계략이었다. 이 와중에 찬밥 더운밥 가릴 겨를이나 있을까? 고쟁이든 뭐든 주는 대로 걸쳐 입어야만 할 터! 유호성에게 아줌마들이나 입을 법한 빨간 고쟁이를 입히고 목포 시내를 활보하도록 만들 심사였던 것이다.
“고마워요. 이 은혜는 나중에 꼭 갚을게요.”
유호성은 허겁지겁 고쟁이를 걸치기 시작했다. 물론 고맙겠지. 눈물 나도록 고마울 거야… 현성애는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배낭을 뒤져 커다란 붕대뭉치를 꺼내들었다. 물론 이 붕대는 모래바닥에 납작 엎드려있는 김지선을 위한 소품이었다. 빨간 고쟁이를 입은 남자가 붕대를 친친 동여맨 여자와 함께 거니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따봉! 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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