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5회> 죽음의 계곡 17
낙랑공주? 현성애는 낙랑공주의 화신이 되어 권도일을 돕겠다고 말한 뒤에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불현듯 서글픈 마음이 솟구쳐 오른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어릴 때 읽었던 낙랑공주의 비련이야말로 어찌나 슬프던지 닭똥처럼 뚝뚝 흘러내리는 눈물로 인해 동화책에 얼룩이 생길 지경이었다.
비련이란 슬프게 끝나는 연애를 뜻한다.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던 어느 젊은 가수와 미모의 여배우도 비련의 주인공들이고,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노래 부른 가수도 결국 비련의 주인공인 셈이다.
‘알겠어요? 나는 비련의 주인공이라고요.’
이를테면 현성애는 이렇게 외치고 있는 중이었다. 애인을 너무 사랑하여 자명고를 비수로 찢어내고 제 아버지의 나라를 적장에게 내주는 낙랑공주처럼, 권도일! 당신을 너무도 사랑하여 스스로 적장 유호성의 품으로 들어가 미캐닉이 되었다는 서글픈 사연을 토로하는 중이란 말이다.
“적의 심장부에 숨어서 나를 돕겠다고요? 그럼 유호성이 모는 불후의 명차를 정비할 때에 일부러 작전을 쓰겠다는 말인가요? 엔진에 똥이라도 쳐넣으려고?”
“당신이 유호성을 짓뭉갤 수만 있다면 유호성의 머신에 똥인들 못 넣겠어요? 하지만 그건 비겁한 짓이지요. 비겁하게 이기느니 멋지게 지는 편이 폼 나요.”
“그럼 어떻게 날 돕겠다는 거요?”
“랠리 열기가 최고조에 달하는 날, 유호성의 기술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머신의 출력을 높여 놓을 거예요. 그날 당신은… 혼신의 힘을 기울여서 유호성을 한 번만 추월해주세요. 낭떠러지 코너라면 더욱 좋겠지요.”
“유호성을 스스로 자폭시키자는 것이로군.”
“맞아요. 그는 혈기가 넘치는 재벌 2세거든요? 국산 거성자동차를 모는 당신에게 추월당하고는 못 배길 만큼 뜨겁지만… 어설픈 심장을 지녔다고요.”
“죽이자는 셈이군.”
“스스로 죽는 거예요. 제 욕심 때문에….”
“무서워, 당신…”
“첫째가 유민 회장을 향한 복수심 때문이에요.”
“두 번째는?”
“도일 씨…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고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전화통화는 이렇게 끝났다. 낙랑공주가 자명고를 찢기로 약속한 이상 호동왕자는 사력을 다해 적진으로 말을 몰아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종호 상무님! 빨리 내 방으로 다시 오세요.”
권도일은 현성애와의 통화를 끝내자마자 다시 도종호의 방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는 도종호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역력하게 묻어났다.
“전무님, 10분 뒤에 다시 통화합시다. 하던 일을 마저 끝내라면서요? 아까 먹은 비아그라 약발이 떨어지기 전에… 해야지요. 그러니 10분만….”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이번주 내로 즉시 레이싱 팀을 발족시켜주세요. 그리고 랠리에 출전할 머신을 선정해 주십시오. 당장 팀을 끌고 뉘르부르크닝 서킷으로 가서 머신 테스트부터 해야겠습니다. 하루가 급합니다.”
서로가 마음은 급했으나 착목하는 곳이 달랐다. 권도일은 독일 북서부 쾰른의 남방 뉘르브르크에 있는 테스트 서킷을 떠올리는 중이었지만, 도종일은 눈앞에 나신으로 누워있는 아가씨와의 화끈한 상열지사만을 꿈꾸는 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