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름지기 4차원적인 복수가 시작되는 중이었다. 어머니에게 허락받고 당당히 아들을 꼬이는 것. 그러면서 뒤로는 어머니의 남편이자 아들의 아버지를 유혹하는 것. 이론적으로는 평생 발각나지 않을 패륜을 축복 속에 벌이는 것…. 가슴에 칼을 꽂아야만 복수일까? 원래 차원 높은 복수란 이처럼 벼랑 꼭대기에 달콤한 꿀을 매달아 놓는 것이다. “한나라의 절세미인 초선이도 여포와 동탁을 이간질시키기 위해 미인계를 썼다지요? 하지만 성공한 뒤에 스스로 우물 속에 뛰어들었잖아요? 저는… 사모님을 위해서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을까요?”
강유리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이는가 싶더니 이내 주르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참으로 기막힌 즉석 연기였다. 하지만 신희영은 그 모습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저토록 어여쁜 처녀가 자기를 위해 몸 바쳐 희생할 것을 마음 다지며 눈물 흘리는 모습에 어찌 감복하지 않을까. “고마워요, 유리 양. 너무 갸륵하군요. 하지만 희생한다는 생각은 버리세요. 그동안 눈여겨 유리 양을 봐왔는데 사실…내 며느리감으로도 하등 손색이 없다고 여겼어요. 내친 김에 유리 양만 싫지 않다면 진심으로 호성이와 사귀어도 좋겠어요. 아이고, 내가 주책이 없지. 이런 얘길 스스럼없이 해도 좋은 걸까?” 강유리와 강준호의 눈이 다시 마주친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강유리의 눈은 대성공이란 듯이 반짝 빛났으나 강준호의 눈빛엔 약간의 그늘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어쨌거나 강준호는 유리의 아버지 아니었던가. 모르긴 해도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을지 모른다. ‘어디까지 희생해야 하냐고? 입술? 그건 좀 약한 감이 있고…가슴까지 만이야. 가슴! 더 이상 진도 나가면 곤란하다고!’ “어머, 죄송해요 사모님. 초선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얼굴로 미인계를 거론하는 것부터가 죄송스럽네요.” “무슨 소리예요? 어쩜…얼굴만 예쁜 줄 알았더니 마음씨도 비단결이군요. 눈물 닦아요. 그리고 이거….” 신희영은 주섬주섬 핸드백을 열더니 진주로 장식된 큼직한 지갑을 꺼내들었다. 그 지갑 속에는 방금 찍어낸 듯한 5만원짜리 새 돈이 한 다발이나 들어있었다. 감격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안타까운 모성 때문일까? 그도 저도 아니라면 회사에서의 헤게모니 쟁탈을 위한 굳은 결의 때문? “얼마 되지 않지만 우리 호성이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군자금으로 쓰세요. 그리고 현금을 쓰면 체면 깎이는 곳이 많거든요? 그런 곳에 가게 될 때에는 이걸….” 신희영이 듬뿍 집어준 돈은 느낌으로만 어림잡아 보아도 100장 남짓, 무려 500만원을 웃도는 금액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까무러칠 지경인데 신희영은 새우젓 장수 덤통 내밀듯이 선뜻 플라스틱 카드 한 장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법인카드예요. 호성이를 유혹하는 일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마음놓고 사용하세요. 한도는 월 1000만원이에요. 그럴 필요도 없지만 할부 구입은 되지 않을 거예요. 무조건 일시불이란 말이지요. 은행 결제는 경리부장이 알아서 하겠죠?”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기뻐 죽을 것만 같은 사람은 강준호였다. 만약 이 자리에 딸과 단둘이만 있었다면 환호성을 지르며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덤덤한 척할 수밖에 없었다. 감히 누구 안전이란 말인가? 자칫 표정이라도 잘못 드러내는 날엔 만사 도루아미타불일 것이니 오히려 긴장이 되었다. 그런데…. “아니예요, 사모님. 전 이런 거 받을 자격이 없어요.” 유리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 아닌가. 저런 떡을 할 년 같으니…. 강준호는 유리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복을 차라, 복을 차! “춘추전국시대의 미인 서시가 물가에 나서면 물고기도 놀라 가라앉았대요. 낙안의 미녀 왕소군의 미모에는 기러기도 놀라 땅에 떨어졌고요. 당나라 미인 양귀비가 꽃을 건드리면 꽃이 부끄러워 잎을 오무렸대요. 제가 그 정도의 미모를 지녔다면 그 법인카드를 받겠어요. 하지만 저는 평범하단 걸 잘 알아요. 그러니 이 돈만 받아도 황송하지요.” 제일 얄미운 년이 예쁘면서도 유식한 여자라더니, 강유리가 꼭 그 짝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