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부산)=주소현 기자] “서울서 왔어? 청주서 아미(방탄소년단 팬클럽)도 왔잖여”
종이 상자를 오려 만든 피켓에 방탄소년단(BTS)을 눌러 적었다. 아래에는 ‘지구’를 두 번 힘주어 썼다. ‘아미’ 박모(71) 씨에게 방탄소년단만큼 소중하고, 지켜야 할 존재가 바로 지구라고 한다. 그가 충북 청주에서 부산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이유다.
박씨를 비롯해 1000여 명의 기후환경시민들이 23일 부산에 총출동했다. 16개 환경단체로 구성된 ‘플뿌리연대’(플라스틱 문제를 뿌리 뽑는 연대)가 부산 벡스코를 중심으로 진행한 ‘강력한 국제 플라스틱 협약을 위한 1123 시민행진’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전국 각지, 전 세계에서 모인 시민들은 오는 25일부터 부산 벡스코에서 열릴 ‘국제연합(UN) 플라스틱협약 제5차 정부 간 협상위원회’에 참여하는 전 세계 지도자에게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해 강력한 생산감축을 포함하는 협약을 지지할 것을 촉구했다.
행진은 ▷플라스틱 오염 발생(제1거점) ▷시민의 목격과 대응(제2거점) ▷강력한 국제 플라스틱 협약(제3거점)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전개됐다. 어른 무릎께 오는 어린아이들부터 60·70대 어르신들까지 목청을 높이며 올림픽공원부터 부산 2호선 센텀시티역, 벡스코를 에워싸는 행진에 참여했다.
주최 측은 플라스틱 쓰레기를 만들지 않도록 공들였다. 종이 상자에 유성 펜으로 적어 피켓을 만들거나, 각자 준비해 온 손수건 등에 실크스크린 방식으로 구호를 찍는 사전 행사를 마련했다. 또 공원 곳곳에 정수기를 비치해 시민들이 각자 물병과 텀블러를 이용하도록 했다.
시민들도 이에 화답하듯 개성 넘치는 차림새와 소품을 뽐냈다. 공익법센터 어필의 이일 변호사는 인기 애니메이션 ‘캐치! 티니핑’을 패러디한 ‘비닐핑’으로 분했다. 플로깅 단체 ‘쓰줍인’은 거대한 담배꽁초 모형을 뒤집어쓰고 나타났다.
행진에 참여한 시민들은 각자의 관심사와 전문성을 십분 살려 플라스틱 오염의 심각성을 알렸다.
교환학생을 마치고 네덜란드로 돌아갔던 로자 드용(Rasa Dejong) 케이팝포플래닛 활동가는 제5차 협상위를 맞아 약 보름 전 다시 한국을 찾았다.
그는 “무작위 포토카드와 팬 사인회 응모를 위해 많은 음반을 사야 하는데, 기획사들은 재활용이나 수거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다”며 “결국 음반들은 거리로, 또 매립지로 버려진다. 팬들이 지구에 해로운 케이팝 체계가 바뀌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거대한 생리대 모형에 탐폰을 붙이고 나온 서정희 여성환경연대 활동가. 일회용 생리용품은 플라스틱으로 돼 있어 잘 썩지 않을뿐더러 인체에도 해롭다는 걸 알리기 위한 착장이다.
그는 “여성의 몸이 플라스틱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지방에 독성이 더 많이 축적되는 경향이 있다”며 “여성은 플라스틱과 화학 성분에 더 취약한데도 생리대, 화장품, 가사 노동에 쓰는 청소용품 등을 통해 플라스틱에 더 많이 노출된다”고 말했다.
특히 부표와 그물 등 플라스틱 어구를 활용한 시민들도 눈에 띄었다. 제주도에서 온 이들이었다. 해양시민과학센터 파란 소속 김민수 씨는 플라스틱 그물을 머리에 얹었다. 약 10개월간 낚싯줄에 걸려 고통받던 남방큰돌고래 ‘종달이’를 상징하는 소품이다.
이경아 지구별약수터 대표는 검은색 양식용 부표를 머리에 얹고, 주먹 크기의 그물용 부표들을 목에 걸었다. 그는 “제주시에는 북서풍을 타고 온 중국발 부표가 쌓이고 있다”며 “수거를 해도 재사용, 재활용도 할 수 없는 플라스틱 쓰레기들”이라고 꼬집었다.
북적이고 들뜬 분위기 속에서 행진이 이뤄졌지만, 한켠에 불안감도 도사리고 있었다. 제5차 협상위가 자칫 헐겁게 마무리돼 플라스틱 오염을 끝낼 기회를 놓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
이경아 대표는 “제주에서 부산으로 날아올 때도 온실가스가 배출된다. 그럼에도 실질적인 협약이 성안되지 않을까 봐 너무 걱정돼 이 자리에 직접 왔다”며 “캠페인만으로는 한계에 다다랐다. 법적 강제성을 띤 협약을 전 세계가 함께 지켜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시윤 환경운동연합 활동가도 “변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에 기분이 무척 좋지만, 동시에 일부 시민들의 축제로 그칠까 두렵다”며 “이들의 목소리가 협상장까지 닿으면 실효성 있는 협약을 끌어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들의 이야기, 기우가 아니다. 마지막 협상임에도 국가 간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고 있어서다. 환경부에 따르면 제3차 협상위 때 33쪽에 그치던 협약 초안은 제4차 협상위를 거치며 77쪽까지 늘어났다. 초안 내 특정 문안에 동의하지 않은 국가를 표시하는 ‘괄호’는 3000개 이상 삽입됐다고 한다.
가장 큰 쟁점은 플라스틱 생산 감축 여부다. 유럽연합(EU)과 한국, 일본 등 67개국으로 구성된 ‘강력한 협약을 지지하는 우호국 연합’(HAC)은 플라스틱 생산 감축을 지지하는 반면, 사우디아라비아 주도로 출범한 ‘플라스틱 지속가능성을 위한 국제연합’(GCPS)은 재활용과 폐기물 관리로도 플라스틱 오염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또 다른 쟁점은 ‘법적 구속력’이다. 국제법적 구속력 있는 협약으로 타결된다면 각국은 플라스틱 오염을 규제하는 국내 법을 마련해야 한다. 이에 기반한 모니터링 및 보고 체계도 뒤따를 수 있다. 한편 일부 국가들은 플라스틱도 온실가스와 같이 자발적인 감축 목표를 세우자며 맞서고 있다.
마지막이자 다섯 번째로 열리는 이번 회의까지 이어진 지지부진한 협상을 매듭 지으려면 개최국인 한국의 외교력도 필요한 상황이다.
더군다나 한국은 플라스틱을 많이 만들고, 많이 쓰는 것으로 손에 꼽힌다. 한국석유화학협회에 따르면 한국 플라스틱 생산량은 1451만3000t(2023년)으로, 중국·미국·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전 세계에서 4번째로 많다. 1인당 플라스틱 소비량은 116.2㎏로 압도적 1위다.
협상위 개최국인 데다 플라스틱 다생산·다소비 국가로서 한국 정부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국내외 기후환경 시민들의 요구다. 그러나 한국 정부대표단 수석대표인 외교부 장관이 회의에 불참하면서 협상이 타결되도록 역할을 다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이 무색해졌다는 비판이 인다.
김선률 그린피스 시민참여 캠페이너는 “300여 명이 참여했던 지난 제4차 협상위보다 많은 시민이 모였다. 이는 마지막 협상 회의에 거는 시민의 기대와 요구가 크다는 방증”이라며 “제5차 협상위 개최국이자 HAC 소속인 한국 정부는 시민의 목소리를 듣고, 협상장에서 강력한 생산 감축 목표를 위해 앞장서야한다”고 말했다.
이세미 플라스틱 추방연대(BFFP) 글로벌 정책고문도 “지구가 플라스틱 오염을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된다”며 “플라스틱 생산 감축을 포함한 협약이 성안될 수 있도록 힘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정부 대표단들이 이를 인식하고 협상장에서 걸맞은 태도를 보이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