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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 산책] 지독한 불운에 울었던 박용운의 라이프 스토리

  • 2017-09-10 14:07|유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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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KBF 부산경남지회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박용운 관장.

수년 전 한국권투위원회(KBC) 사무실이 있던 장충동에 들려 체육관 등록을 마친 후 신라호텔이 병풍처럼 펼쳐진 장충동 리틀야구장에 간 적이 있습니다. 리틀야구장은 오래전 초등학교 전국야구대회가 열리던 곳이었죠. 제가 야구부 소속이었던 군산 남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76년 전국 초등학교 야구선수권대회에서 조계현과 장호익, 고장량, 한경수, 백인호, 정명원 등이 한 팀을 이뤄 충북 이수초등학교를 꺾고 우승컵을 들어올린 감격의 현장이었죠. 이수초등학교는 당시 준결승에서 이동석(동국대.빙그레), 오석환(경희대, KBO 심판)이 활약한 군산초등학교를 제압하고 결승에 올라온 강호였죠.

스탠드에 앉으면 바라보이는 신라호텔은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추념하기위해 세운 박문사(博文寺)라는 사찰이 있었던 곳이죠. 바로 이곳에서 안중근 의사의 아들 안중생이 이토의 아들인 이토 분키치에게 고개를 숙여 민족의 공분을 사기도 했죠. 백범은 호부견자(虎父犬子)라고 일갈하며 진노했죠. 아픔과 치욕도 역사이기에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시는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죠.

또한 지근 거리에는 동국대가 자리잡고 있는데 1983년 10월 제64회 전국체육대회가 끝나고 오늘 링사이드 산책의 주인공인 박용운 관장과 필자, 그리고 심영자 회장이 동국대를 방문했던 추억의 장소입니다. 방문 이유는 당시 동국대 불교협회와 연결되어 있던 심영자 회장이 박용운을 동국대에 진학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관계자들을 만났지만 막판에 결렬돼 버렸죠. 박용운으로선 아마추어 특기생이 아닌 프로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니, 입학이 쉽지 않았으리라 예상됐지만, 막상 협상이 결렬되자 무척 속이 상했을 겁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박용운(64년생, 부산)이라는 복서는 1978년 해운대중 2학년 때 처음 복싱에 입문합니다. 부산의 형제 복싱체육관이었죠. 그리고 그해 제1회 회장배 전국선수권대회에 플라이급으로 출전해 대뜸 우승과 함께 베스트 복서로 선정되며 ‘복싱 신동’이란 소리를 들으며 성장합니다. 곱상한 외모에 사우스포로 카운터펀치만큼은 발군이었죠. 당시 부상(副賞)으로 컬러 TV를 받은 박용운은 졸업반인 1979년에도 파죽지세로 전국 무대를 평정하며 복싱명문 부산체고에 합격했으나 같이 시험을 치른 절친한 동료가 탈락하자 입학을 포기합니다.

박용운은 형제체육관이 문을 닫자 인근의 광명체육관(관장 최종용)에서 재수하며 운동했고, 1981년 부산 금성고에 입학했습니다. 같은 해 전국학생선수권 결승(밴텀급)에 진출해 이방헌(한영고)에게 접전끝에 패하며 준우승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이어진 전국체전 부산선발전에서 김명복배 최우수복서인 서윤교(가야고)와 안익노, 김지홍(동아고) 등 기라성 같은 2년 선배들을 차례로 꺾고 출전권을 획득했습니다. ‘천재 복서’라는 호칭이 붙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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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회 전국체전 밴텀급에서 금메달을 딴 박용운(왼쪽)과 한진흥 관장.


박용운은 제62회 전국체전 본선 결승에서도 전남대표 문성길(61년생, 목포 덕인고)을 준결승에서 꺾고 올라온 전북대표 최주영(63년생, 이리 남성고)을 맞이해 카운터펀치를 수차례 적중하며 완승을 거둡니다.

박용운의 금메달은 부산팀의 유일한 금메달이었죠. 이후 그는 부산 복싱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급부상합니다. 1982년엔 제6회 김명복배 대회에는 페더급으로 한 체급 올려 출전해 전년도 전국체전 플라이급 금메달리스트인 김강원(군산제일고)을 상대로 원사이드한 경기를 펼치며 우승합니다. 학생 무대에서 적수가 없자 성인 무대로 눈을 돌려 남미 최초의 국제대회인 볼리바르컵(베네주엘라)에 출전해 당당히 동메달을 획득하며 출충한 실력을 인정받죠. 당시 볼리바르컵은 쿠바. 미국. 소련이 모두 참가한 세계선수권에 버금가는 대회였죠.

관록이 붙은 박용운은 그해 뉴델리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3차 선발전에 출전해 김용호(동아대)를 꺾고 우승하며 최종선발전에 진출합니다. 하지만 최종선발전 첫 판에 국가대표이자 복싱사상 최초의 세계대회 우승자인 간판 박기철(61년생, 한체대)과 맞대결을 펼쳐 패하고 맙니다. 체력이 다소 부족한 박기철을 상대로 3회 적극공세를 펼치며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2ㅡ3으로 패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불운의 서곡이 되고 맙니다. 당시 동아일보의 이계홍 기자는 네임벨류 때문에 기울어진 경기였다고 평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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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대표선발전(페더급)에서 박기철과 맞붙는 박용운(왼쪽).


그리고 그해 벌어진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최종선발전에 협회 추천으로 출전한 박용운은 첫 판에 강성덕(경남대)를 맞이해 우세한 경기를 펼치지만 역시 2ㅡ3으로 쓴잔을 마십니다. 2회 레프트 카운터에 걸린 상대가 고꾸라지며 경기가 종료될 상황까지 몰고 갔지만 패배했죠. 강성덕은 박용운의 강타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다음 경기에 기권하는 바람에 안타까움은 더욱 컸죠.

박용운은 졸업반인 1983년에도 제7회 김명복배 대회에서 킹스컵 국가대표인 추경호(한일고-수원대)를 라이트 카운터 블루로 2회 KO시키는 등 앞도적인 기량으로 대회 2연패에 성공함과 동시에 베스트복서에 선정됩니다. 박용운은 도미니카 세계청소년선수권의 대표선발전에서도 우승하며 본선에서 최희용, 김기택 등과 함께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1964년 9월 이후 출생자로 되어 있던 참가자격이 64년 11월 이후로 변경되면서 64년 10월생인 박용운은 참가자격을 상실하고 맙니다. 당시 준우승자인 원점도(한영고)가 비행기 트랙에 오르기 위해 떠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죠.

그후 아시아 청소년대회(일본)에도 발탁되어 김기택(수원대), 안영수(한체대) 등과 훈련하던 중 이번엔 참가 직전 참가국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대회가 무산되고 말았죠. 태극마크가 선명한 단복까지 나온 상태에서 발생한 지독한 불운의 연속이었죠. 당시엔 메달 색깔에 따라 군 면제 혜택까지 연결되어 있었기에 아쉬움이 컸죠. 우여곡절 끝에 1984년 용인대학에 입학한 고교랭킹 1위 박용운은 88프로모션에 입단할 당시 LA올림픽 선발전까지만 프로행을 유보시켜달라고 요청한 후 훈련에 몰입합니다.

당시 페더급 1인자였던 박기철이 광주체육관에서 훈련하던 중 훈계를 받는 과정에서 체벌을 당하자 '욱'하고 뛰쳐나갔고, 이어 전격적으로 은퇴를 선언하면서 LA올림픽 페더급은 무주공이 되면서 박용운이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죠. 하지만 그해 3월 17일 박용운은 88프로모션이 주최한 출전 선수 명단에 국가대표 출신 김의진(63년생. 군산대)과 함께 메인이벤트로 경기가 잡히면서 그의 프로행은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올림픽 꿈이 사라진 상태에서 경기를 치른 박용운은 무난한 판정승을 거뒀지만 의욕이 반감됩니다. 그리고 연이은 악재가 기다립니다. 3개월 후 리틀 반고얀(필리핀)이라는 복서와 치른 2차전에서 왼손 새끼손가락이 골절되면서 1년간 공백이 생겼고, 무구루마와 잡혀있던 동양 타이틀전이 동료인 최연갑에게 넘어갔습니다. 1년 후 치룬 요시오카(일본)와의 3차전에서는 엄지손가락이 골절되면서 6개월간 공백을 갖게 됐습니다.

이후 박용운은 전열을 추스려 4연승(3KO승)을 거두며 IBF 주니어 페더급 3위를 유지하며 2위였던 파운삭 무앙수린(태국)과 타이틀 결정전을 치를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IBF 1위였던 이승훈(60년생, 극동체)이 WBA. WBC 주니어 페더급 타이틀을 조율하던 중 갑자기 괘도를 수정하며 87년 1월 IBF 주니어페더급 타이틀(파운삭 무앙수린에 9회 KO승)을 잽싸게 인터셉트해 버립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 본 꼴이 되고 말았죠,

절망에 빠진 박용운은 돌파구를 찾아 해외로 눈을 돌립니다. 87년 10월과 88년 2월 박용운은 미국 원정에 나서 2차례 인상깊은 경기를 펼쳤고(1승1무) 현지 프로모터들은 박용운에게 88년6월 WBA 챔피언십 16강 토너먼트 경기 출전권을 부여해 후에 세계 챔피언에 등극하는 헤수스 살루두(미국.22승11KO승2패)와 대결을 벌입니다. 이 대결이 박용운 복싱사에 터닝포인트였죠. 총상금 22만 달러가 걸린 이 대회는 세계랭킹 5위권에 든 선수들만 출전하는 경기였는데 미국 전역에 생중계될 정도로 인기가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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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바르컵 출정식에서 장윤호(한국체대)와 박용운(부산금성고.오른쪽).


이 경기에서 박용운은 치열한 타격전 끝에 9회 결정타가 성공하며 상대를 그로기까지 몰고갔습니다. 하지만 원정경기의 헨디캡 속에 또 다시 1ㅡ2 판정으로 패하며 15전 만에 첫 패배를 기록합니다. 미국 현지에서 호평을 받고 거액의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지만 이번엔 군복부가 발목을 잡습니다. 귀국 후 5일 만에 현역에 입대한 박용운은 훈련병 생활을 끝내고 수경사 입대가 예정돼 있었죠. 그런데 이 타이밍에 이번엔 수경사 복싱부가 전격 해체되고 맙니다. 육두문자가 절로 나옴과 동시에 결국 탈영까지 했으나 30개월을 꼬박 채운 뒤 전역합니다.

박용운은 1991년 3월 비장한 각오로 컴백하며 5연승(3KO승)을 기록한 후 92년 1월 필리핀 원정경기로 동양 페더급 타이틀전을 치릅니다. 챔피언 크리스 사쿠이드는 1989년 5월 한국 원정에서 동양 챔피언을 지낸 박병수(64년생, 와룡체)를 판정으로 잡은 실력파였죠. 이 경기서 박용운은 3회 회심의 어퍼컷으로 상대의 안면을 강타했고 상대가 붉은 선혈을 흘리면서 비틀거리자 주심은 박용운의 KO승을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필리핀 측에서 버팅에 의한 가격이라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주심은 무판정으로 번복했고, 박용운은 링바닥에 주저앉아 20분 동안 통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결국 박용운은 허탈한 심정으로 빈손으로 귀국했죠. 요즘 프로야구처럼 비디오 판독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바람처럼 날아간 동양타이틀이었죠. 이후 사무엘 두란을 2회 KO시키는 등 8연승(5KO승)을 거두며 WBC 슈퍼밴텀급 챔피언 다니엘 사라고사(멕시코)와의 세계 타이틀전이 가계약되면서 방송국과 중계료 문제를 조율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1995년 어느 날 88프로모션이 공중분해되면서 결국 단 한번의 세계 타이틀전도 치러보지 못한 채 좋은 인연, 나쁜 인연 다 내려놓고 쓸쓸하게 고향 부산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복서는 은퇴해서 기록을 남기듯 30전 26승(15KO)1무2패1무판정을 간직한 채.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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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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