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의 휴양지…제주 포도호텔(PODO HOTEL)
자연 · 한국적 미 · 인간에 대한 애정 세계적 건축가 이타미 준 철학 녹아든 자연친화적이고 품위있는 안식처
제주 오름 · 초가집 모티브로 설계 위에서 내려다보면 한송이 포도가… 건축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
베르나르 뷔페 ‘파리풍경’ 등 곳곳에 배치된 예술품들로 감정정화 아라고나이트온천수 안식의 화룡점정
한숨을 돌리는가 싶으면 다시 다른 일이 눈앞에 닥치고, 어떨 때는 네댓 개의 핫이슈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나를 채찍질하는 동안 하루가 저문다. 다음날 다시 뜬 찬란한 햇살이 얄밉도록 세월은 쉴 틈 없이 현대인을 끌고간다.
매일 숱한 결재와 판단을 해야 하는 경영자와 고관대작은 자신의 판단이 경영철학과 인생목표에 비춰 적절했던 것인지, 한 달 전 판단과 같은 맥락인지 세심히 돌아볼 틈이 없다. ‘노동량의 크기가 생산성은 아니다’는 평범한 이치조차 잊는다.
멈출 줄 모르는 CEO들이 태반이다. 사회관계론의 대가인 미국의 데일 카네기는 아무리 바빠도 하루 몇 차례 정도 ‘5분 명상’할 것을 권하면서 역사에 남을 위인에게 명상과 안식이 필수였음을 일깨운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상소는 ‘느림은 삶의 매 순간을 구석구석 느끼기 위해 속도를 늦추는 적극적인 선택’이라고 했다. 순간을 구석구석 느낀다는 것은 새로운 혜안을 제시한다. 혜민 스님의 말처럼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안식 속에 있다는 것이다.
사회지도층에 있어 휴식은 휴식이 아닐 때가 많다. 사람들이 알아볼 때가 많고, 휴식 중에도 보스의 판단을 악착같이 구하는 ‘충성스러운’ 참모도 있기 때문이다. 노블레스, 그들도 은둔하고 싶을 때가 있다.
‘잠수 타기’ 괜찮은 호텔이 있다기에 제주공항에서 서귀포 방향 도령로를 따라 25㎞가량 가다가 캐슬렉스골프장 입체교차로에서 중산간 쪽으로 좌회전해 산록남로 왕복 2차선 도로를 몇 분간 달려보지만, 사방을 둘러보아도 골프장과 고급펜션만 간간이 눈에 띌 뿐 호텔같이 생긴 건물을 볼 수가 없다. 캐슬렉스에서 4㎞만 가면 있다기에 서귀포 거의 다 간 지점에서 다시 차를 되돌려 찬찬히 살펴보니 과연 단층짜리 휴양 호텔이 감춰져 있었다.
1999년 다시 고향 제주를 방문한 재일사업가 김홍주 씨는 한라산 해발 400m 지점에서 산방산을 바라보면서, 누구보다도 격무에 시달릴 노블레스만의 휴양호텔을 짓는 구상을 최종 정리한다. 사회지도층이 제대로 된 휴식 기회를 얻는다는 건 국민을 위해 더 나은 대안을 만들고, 새로운 혜안을 갖는 자양분이 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평소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김 회장은 같은 재일교포로서 친하게 지내던 세계적 건축가 이타미 준(한국명 유동용ㆍ77)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고 품위있는 안식처(Boutique Sanctuary) 같은 호텔을 지어달라고 요청한다. 고향에 대한 애정을 담아 누구든 향수를 느끼고 자연친화적이며, 격조있어야 한다는 김 회장의 까다로운 주문에도 이타미 준은 자신감을 보인다.
제주의 오름과 초가집이 지붕의 콘셉트였다. 1층짜리 26개 객실을 하나로 이어놓은 유연한 곡선의 지붕은 위에서 보면 포도송이를 닮았다. 이타미 준은 자연미와 한국의 미를 포도호텔에 반영한다. 앞뜰엔 제주돌담을 칸 지어 쌓고는 소채와 꽃을 심었고, 작은 정원 중정(中庭)에는 고사리ㆍ솔비ㆍ고냉이ㆍ산수국 등 자생식물을 편안하게 배치한다. 실내와 실외의 소통을 위해 안팎으로 이어지는 작은 폭포와 개울을 만들고, 복도 곳곳에서 밖을 훤히 내다볼 수 있도록 유리막을 조성했다. 긴 복도의 중간쯤에는 하늘을 향해 뚫려 유리관으로 싸여 있는 실내정원 캐스케이드가 있다. 이곳에는 계절에 따라 다른 야생화가 심어져 복도에서도 자연을 느끼게 한다.
학생들의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구상회화의 왕자’ 베르나르 뷔페의 ‘파리풍경(Vue de Paris)’을 비롯해 국내외 내로라하는 화백의 진품이 걸려 갤러리가 주는 감정 정화를 체험한다. 지하 2001.3m에서 끌어올린 아라고나이트온천수는 안식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재계 안주인은 가끔 이곳에 들러 충전한다. 그는 서귀포 변두리 평범한 횟집의 단골이기도 하다. 한 장관급 인사는 부하직원에게 연락하지 않은 채 이곳에서 ‘잠수’ 탄 뒤 국민 체감도 높은 정책을 연이어 내놓기도 했다.
2001년 이 호텔이 완공되자 가장 기뻐했던 것은 김 회장을 기억하는 마을주민이었다. 고향에 대한 사랑이 세계 최고 수준의 건축물로 거듭난 데 대한 희열이었다. 2003년 이타미 준은 프랑스 국립 기메동양미술관에서 개최된 ‘전통과 현대’전에서 포도호텔 등 작품을 소개한 뒤 프랑스 예술문화 훈장 슈발리에를 수상한다. 두 재일교포의 한국사랑, 제주사랑으로 빚어낸 포도호텔은 제2회 아시아 주거문화 및 주거경관상을 수상하고 올 3월 제주시내 숱한 호텔로는 유일하게 제주의 아름다운 건축물로 뽑혔다.
함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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