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차엽(30)은 뒤늦게 빛을 발한 10년차 배우다. 지난해 독립영화 ‘18:우리들의 성장 느와르’에서 주연을 맡으며 업계의 주목을 받았고, 최근 종영한 SBS ‘이혼변호사는 연애중’(조유상 역)을 통해 가능성을 증명했다. 자신의 연기인생에서 처음으로 맡아본 ‘진지한 악역’이었다고 한다. 타락한 비운의 스타에 불륜남. 비중있는 역할이지만 “초반엔 단역처럼 보일 것”, “최대한 정체를 감출 것”, “드라마 후반으로 갈수록 반전을 보여줄 것”이라는 주문을 받았다.
이 역할에 캐스팅되며 차엽은 체중 감량을 먼저 했다. 하루에 세 번 PT를 받고, 공복에 유산소운동을 했다. 주식은 닭가슴살, 다이어트의 동반자는 자전거였다. 오디션 이후 일주일 만에 8kg을 뺐고, 드라마 촬영 전까지 10kg을 더 감량해, 82kg까지 줄였다.
“그런데도 모니터를 하니 화면엔 더 뚱뚱하게 나오더라고요. 아…이런 말 해도 될지.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외모에 많이 실망했어요.”
하지만 제작진에겐 “도박, 술로 망가진 스타의 현재를 연기하는 데엔 안성맞춤이었다”는 만족스러운 평가를 받았다. 외적인 모습에 연기가 더해지니 받은 칭찬이었다.
처음 해보는 악역, 사연 많은 남자의 인생에 자기 스타일을 입히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다른 배우의 연기를 참고하는 스타일도 아니”라고 한다. “누군가의 연기를 참고하면 그 배우의 버릇이 생각나고, 또 그걸 따라하게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제가 해왔던 것 안에서 캐릭터를 발견하는 것이 힘들더라고요.” 당연했다. 이제껏 한 번도 연기한 적 없는 캐릭터이기에, ‘맨 땅에 헤딩’이었다. “업계에서 오래 종사한 사람, 갓 입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거기에 나만의 연기를 얹어 만들어가는 것”이 차엽의 방식이었다. ‘이혼 변호사는 연애 중’은 때문에 차엽에겐 “가장 진지하게 연기공부를 하게 한 작품”이 됐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았다. “완벽하게 준비하고 생각했던 모습이 보여야 하는데, 브라운관에서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너무 착해보이더라고요. 어느 장면에선 눈빛이 정말 나빠야 하는데, 왜 감정에 심취했었나 싶더라고요. 영화와 드라마는 그런 게 달라 힘들더라고요. 영화는 앵글을 보고 그 안에서 놀면 되는데, 드라마는 전체를 보기에 그 안에서 연기하는 것이 힘들었죠. 아쉬운 부분이죠.”
벌써 10년차 배우인데도, 자신의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이제 막 시작한 사람처럼 설렘이 넘친다. 차엽의 연기인생에 찾아온 터닝포인트는 얼마 되지 않았던 탓이다. ‘18:우리들의 성장 느와르’가 기점이었고, 그 직전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소속사는 있었지만, 회사의 도움 없이 혼자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왔다. 주방 설거지, 필라테스 센터, 막노동 등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직장생활도 했고, 쇼핑몰 사업을 하려다 사기도 당했다. 길었던 무명의 무게는 차엽을 생활전선으로 던져놓았다. “그 때엔 이제 곧 서른인데,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싶었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어요. 배우 지망생은 너무나 많고, 자꾸만 절실해지는데 설 자리가 점점 줄더라고요. 오디션을 볼 때마다 개성있는 배우보단 외모와 이미지가 선택사항이 되기도 했고요.”
2년 6개월, 연기를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삶과 투쟁을 벌인 차엽의 이 시간은 그의 감정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자양분이 됐다.
그러다 찾아온 ‘18:우리들의 성장 느와르’는 차엽의 많은 것을 뒤바꾼 작품이었다. 연기에 대한 열정을 다시 살려줬고, 보다 넓은 길로 이끌어줬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어요. 딱 한 번만 더 연기를 한 뒤 정말 다 털어내자 싶었죠. 출연료도 받지 않고 함께 한 아주 작은 역할이었어요. 단역으로 출발했는데 점점 비중이 커지더라고요.” 차엽은 이 영화에서 리더십 강하고 의리 있는 남자주인공 현승 역을 연기했다. “영화를 찍으며 자기 일을 하는게 이렇게 행복하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어요. 스트레스도 풀리고요. 배우는 감정노동을 하는 사람인데, 제 안의 감정을 다 쏟아내니 희열을 느끼더라고요. 계속 하고싶다,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차엽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운동을 시작해 프로의 꿈을 키웠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수영선수로 활약했다. 아버지는 테니스, 어머니는 탁구, 누나는 바디 아트를 하고 있는 운동집안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부상으로 어깨수술을 받기 전까진 이 업계에 발을 들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나만을 보고 달려오던 긴 시간이 부상으로 좌절됐다. 다행히 “바깥으로 돌 줄 알았는데 일찍 철이 들었다”고 한다. 목표가 뚜렷한 일을 꿈꿨던 만큼 새로운 길을 찾는 데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연예기획사와 계약을 맺고, 연기를 공부했다. 대학도 연극영화과에 진학해 배우로서 차곡차곡 단계를 밟아갔다. 영화 ‘폰 부스’(2002)에서의 콜린 파렐의 연기를 본 후, 남성적인 매력의 섹시함을 갖춘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린 나이에 좌절했지만, 믿음을 가지고 지켜봐준 부모님은 차엽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긍정적이고 건강한 가치관을 키워준 것 역시 부모님이다. ‘차엽’(본명 김종엽)은 아버지가 지어준 ‘종엽’의 ‘엽’과 어머니의 성을 딴 예명이다.
이미 10년간 쌓아온 필모그라피는 적지 않지만, 대중에겐 여전히 신인에 가까운 얼굴이다.
“전 이제서야 배우라는 직업에 발을 담근 것 같아요. 그 전까지는 학생이었다고 생각해요. 조급한 마음은 없어요. 제 주위 사람들이 잘 됐다고 해도,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을 가지진 않아요. 노력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극 안에서 희노애락을 다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고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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